안녕하세요 엘입니다.
-0-;; 왠지 글을 늘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하하 -0-;;;;
정부들과 그후손들...(235) 릴리 랭트리 : 에드워드 7세의 정부(두번째)
릴리 랭트리
Emilie Charlotte Le Breton
Emilie Charlotte Langtry
Lillie (or Lily) Langtry
(October 13, 1853 – February 12, 1929),
런던에 거처를 마련한 릴리는 이제 사교계에 나갈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그리고 곧 기회가 오죠. 1877년 릴리의 오빠였던 클레멘트는 7대 레넬러 자작이었던 토마스 존슨의 사생아 딸인 앨리스와 결혼합니다. 레널러 자작은 릴리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었죠. 이런 관계는 레널러 자작이 릴리를 런던 상류층에게 소개시켜 주는데 릴리가 처음으로 간 파티에서 릴리는 아름다움과 위트있는 말솜씨로 곧 사교계에서 알려지게 됩니다.
이 날 릴리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얻는데, 화가였던 프랭크 마일스는 릴리의 스케치를 몇장했으며 이것은 후에 엽서로 만들어져 매우 잘팔리게 된다고 합니다. 또 다른 화가였던 존 밀레이는 저지 출신의 화가였는데 같은 고향 출신의 릴리를 보고 영감을 받았으며 "저지의 릴리"라는 제목의 초상화를 그리게 됩니다. 릴리는 백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릴리 랭트리의 애칭이기도 했으며 릴리 역시 저지 출신이기에 이중적 의미가 있는 그림이었죠. 이 그림은 릴리 랭트리를 더욱더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로열 아카데미에 출품된 이 그림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으며 그림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심지어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로프가 손상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저지의 릴리
그리고 이런 유명세는 당연히 웨일스공인 버티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고 그는 곧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1877년 5월 24일 한 디너 파티에서 릴리는 버티의 곁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 릴리는 바로 버티의 정부가 됩니다. 웨일스공의 정부가 되면서 릴리 랭트리는 빅토리아 여왕을 정식으로 알현하기도 했었습니다. 버티의 아내였던 알렉산드라는 남편이 릴리와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것을 묵인했었습니다.
이렇게 릴리 랭트리는 1877년 후반부터 1880년초까지 웨일스 공의 정부로 지냈습니다만 아마도 1879년 후반에 이미 웨일스 공과의 사이는 서서히 정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녀는 이때쯤 다양한 다른 남자들와 연애관계가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웨일스 공과 릴리 랭트리는 좋게 헤어졌으며 이후에 그녀는 웨일스 공의 친구로 남았다고 합니다. 웨일스 공은 후에 릴리가 배우로 데뷔했을때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웨일스 공
1879년경 릴리 랭트리는 다양한 남자들과 연애관계가 됩니다. 아마도 웨일스 공 주변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들과 연애질을 했던 것일 듯합니다. 이때쯤 그녀가 사귄 사람들은 바텐베르크의 루이스공이나 20대 샐리스버리 백작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널러 자작의 사생아 아들이었던 아서 클라렌스 존스도 있었죠. 특히 1880년이 되면서 릴리는 웨일스 공과 확실히 헤어지게 되면서 다른 남자들과 연애질을 드러내놓고 시작했고 이때문에 가쉽성 기사에서는 그녀가 남편과 이혼할것이며 웨일스 공이 이를 동의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에드워드 랭트리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었습니다.
1880년 6월 릴리 랭트리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때 남편인 에드워드 랭트리는 아이 아버지가 아니었죠. 릴리 랭트리는 남편이 미국으로 가 있는 동안 아이를 낳았고 남편에게는 비밀로 했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릴리 랭트리의 남편인 에드워드 랭트리는 아내가 아이를 낳고서야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쨌든 그녀의 주변 남자들은 그녀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특히 바텐베르크의 루이스가 그랬습니다. 그는 심각하게 아이를 위해서 릴리 랭트리와 결혼해야하나 고민을 했었는데 이 문제는 릴리 랭트리의 남편이나 루이스의 부모가 이를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돈으로 해결되었으며 루이스는 전함을 타고 국외로 발령났으며 릴리 랭트리는 아서 클라렌스 존스와 함께 파리로 가서 1881년 딸인 잰 마리 랭트리를 낳게 됩니다. 루이스는 잰 마리가 자신의 딸이라고 여겼기에 학비등을 지원했으며, 루이스의 아들인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은 잰 마리 랭트리가 자신의 이복 누나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
후에 밀포드헤이븐 후작 루이스 마운트배튼
그러나 1978년 릴리 랭트리와 아서 클라렌스 존스 간의 열정적인 편지가 출판되면서 둘의 관계가 매우 깊은 관계였었다는 것이 알려졌으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잰 마리 랭트리의 친아버지가 사실 아서 클라렌스 존스 일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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