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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1) 들어가면서...간략한 프랑스 왕국사

엘아라 2019. 5. 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프랑스는....흠..손대기가 무서운곳인데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 메로빙거 왕조부터 해야하나 아니면 카롤링거 왕조부터 해야하나 위그 카페부터 해야하나 고민중입니다.


일단 위그 카페나 메로빙거 왕조 둘중에 하나로 시작해야할것같은데 위그 카페로 하면 좀더 편하긴 하지만 10세기부터 하는 것이구요. 아니라면 5세기 프랑스라는 나라의 영토를 확립했던 첫번째 국왕이었던 클로비스부터 시작하면 자료가 애매합니다. 나라 역사도 이야기하기 머리 아프구요 =-=


일단 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ㅠ.ㅠ


프랑스의 왕비들...(1) 들어가면서...간략한 프랑스 왕국사


프랑스는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선사시대와 고대시대를 거쳤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비옥한 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남부 프랑스 지방에 정착해서 무역항을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프랑스는 여러 민족들이 와서 정착하던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가 아닌 부족 단위의 작은 나라들이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죠. 이 부족들을 통합한것은 바로 강력한 외부 세력인 로마제국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오래도록 "갈리아"지방이라고 부르던 이 프랑스 지방을 점령하려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전쟁을 치루면서 "갈리아 전기"라는 글을 썼으며 이 글은 현재까지도 번역되는 글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로마에 복속된후 갈리아 지방은 오래도록 로마화가 됩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약화되고 외부에서 새로운 게르만 세력이 유입되면서 이 지역을 약탈하거나 결국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몰락은 이전에 로마화 된 많은 지역의 국가 시스템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이 갈리아 지방도 다르지 않았죠.


국가 조직이 정비가 된 것은 바로 클로비스 국왕 시절입니다. 메로빙거 왕가의 국왕인 클로비스는 분할된 지역들을 군사력을 통해서 흡수 통합해서 현재 프랑스 지역이 될 지방의 통합을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주변의 다른 기독교 군주들과 달리 가톨릭을 받아들였으며 로마의 주교(교황)으로부터 그의 세속적 지위에 대한 승인을 받았으며 프랑크 인들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프랑크 왕국을 성립하게 됩니다.



클로비스


하지만 클로비스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을 했으며 그가 통합한 프랑크 왕국은 여러개의 나라로 쪼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과도한 권력투쟁을 일어나게 만들었으며 결국 메로빙거 왕가가 몰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메로빙거 왕가가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그 중간의 권력은 왕실의 집사 역할을 했던 궁정 행정가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페펭 가문의 이 지위를 독점하게 되면서 국왕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죠. 결국 교황은 페펭 가문 출신인 페펭 르 브레프에게 왕위계승권리의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이후 페펭 르 브레프의 아들인 샤를먀뉴는 결국 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호칭까지 받게 되죠. 그리고 이 가문은 카롤링거가문이라고 불리게 되죠.



샤를마뉴

16세기 그림


하지만 샤를마뉴의 손자들은 계승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웠으며 결국 베르됭 조약으로 샤를마뉴가 통합한 나라는 분리되게 됩니다. 여기서 독일과 프랑스가 갈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죠. 베르됭 조약이후 프랑스에서는 봉건제도와 지방분권제도가 정착했으며 이것은 지방의 여러 통치자들의 권력을 점차 강화시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카롤링거 가문이 쇠퇴하면서 지방 군주였던 여러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햇으며 심지어 국왕으로 선출되기도 합니다. 특히 강력한 노르드인들이었던 바이킹의 침략은 이런 귀족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있었으며 특히 앙주와 블루아 백작 지위를 가지고 있던 로베르 가문이 득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가문 출신의 위그 카페가 바로 국왕으로 선출되게 되면서 프랑스의 카페 왕가의 시조가 됩니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왕국은 사실 이 위그 카페가 국왕위에 오르면서 형성된 나라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위그카페

19세기 그림


카페 왕가의 초기는 역시 주변의 강력한 귀족들의 압력에 시달렸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바이킹 출신으로 노르망디를 점령한 노르망디 공작 가문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멀리 시칠리아까지 나가게 되는데 노르망디 공작은 무력으로 잉글랜드를 점령해서 잉글랜드의 국왕 지위까지 얻게 되죠.


카페 왕가는 귀족들과 연합, 정략결혼등을 통해서 세력을 점차 넓혀나가게 됩니다. 위험한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점차 왕권은 강력해져갔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남성 후계자를 얻지 못했고 이것은 백년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필리프 4세와 자녀들 그리고 동생


필리프 4세의 세아들들에게 모두 남성 후계자가 없게 되면서 카페 왕가 직계가 단절됩니다. 그리고 왕위는 필리프 4세의 조카였던 발루아 백작 필리프 6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만 여기에 프랑스 내 영지 문제 때문에 갈등을 빚던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가 개입하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인 이자벨이 필리프 4세의 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죠.


필리프 6세

발루아 가문의 시조

발루아 가문은 카페 가문의 분가입니다.



발루아 왕가는 카페 가문의 방계 가문으로 프랑스의 왕위를 얻었지만 이후 가문의 치세 기간동안 100년전쟁에 얽히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샤를 7세때 잉글랜드에 승리를 거두면서 본격적인 프랑스의 중앙 집권화를 위한 길을 열게 됩니다. 이후 결혼으로 브르타뉴 공작령을 합병햇으며, 부르고뉴 공작과 투쟁등을 하면서 점차 프랑스 내 강력한 귀족들을 억누르게 됩니다.

발루아 왕가가 국왕들 역시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럴때마다 가문의 가까운 친척들이 뒤를 잇게 됩니다. 백년전쟁이후 완전히 확고히 정착된 살리카법에 따라서 가문의 남성 후손들이 계속 이어가게 되는 것이었죠. 하지만 카페 왕가의 필리프 4세처럼 발루아 왕가의 앙리 2세의 세명의 아들들 역시 이어서 왕위에 올랐지만 후계자를 둘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멀고먼 친척이었던 부르봉 가문의 앙리가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가가 시작됩니다.

부르봉 가문은 카페 왕가의 머나먼 방계 가문중 하나였습니다. 성인으로 시성되어서 "성왕"이라고 일컬어지게 되는 루이 9세의 막내아들로 클레몽 백작이 되는 로베르가 가문의 조상이었습니다. 로베르의 아들인 루이가 첫번째 부르봉 공작이 되면서 이후 그의 가문은 부르봉 가문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었죠. 앙리 4세는 이 부르봉 공작의 후손으로 그의 어머니는 나바라의 여왕이었기에 나바라의 국왕이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앙리 4세가 왕위를 얻게 되면서 프랑스와 나바라의 군주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와 나바라는 같은 군주가 통치합니다. 사실상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바라는 이제 프랑스에 편입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죠.

앙리 4세

부르봉 가문 출신의 첫 프랑스 국왕



이후 부르봉 가문은 프랑스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특히 루이 14세 시절의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됩니다. 전 유럽은 그의 궁전인 베르사유 궁전을 따라했으며 루이 14세는 많은 정치문제에 개입하기도 했었죠. 특히 손자인 필리프를 에스파냐 국왕으로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부르봉 왕가는 몰락하게 됩니다.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으며 그의 아들은 학대로 인해 어린시절에 사망하게 되죠. 그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프랑스 왕위를 이어왔던 카페 왕가도 이 시기에 단절되게 됩니다.

루이 16세



이 혁명기간동안 프랑스는 공화국이었지만 이후 복잡한 정치상황을 거쳐서 유럽의 상당부분을 장악했던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를 자신의 직할령으로 만들었으며 정복한 나머지 지역을 자신의 가족들이나 측근들에게 분배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국은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죠.

나폴레옹



프랑스에는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복위해서 부르봉 가문 더 넓은 의미에서는 카페 왕가가 다시 통치 군주의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루이 18세에게는 후손이 없었으며 그의 동생인 샤를 10세가 즉위합니다만 그의 보수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결국 7월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는 가족들과 망명을 해야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들과 손자들이 잇엇지만 결국 손자대에 이르러서 더이상 후손을 얻을수 없었기에 이후 부르봉 직계 역시 단절되게 됩니다.

샤를 10세

부르봉 본가의 마지막 통치 군주



7월 혁명이후 프랑스 왕위는 부르봉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던 오를레앙 가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를레앙 가문은 루이 13세의 아들이자 루이 14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를 선조로 하는 가문으로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이 프랑스의 국왕 루이 필리프로 즉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역시 2월 혁명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는 공화국이 됩니다.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

오를레앙 가문 출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통치 군주



재미난 것은 프랑스 공화정은 또 잠시 멈추게 되는데 바로 나폴레옹의 조카라고 알려진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후 결국 스스로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면서 입니다. 물론 그의 치세는 결국 퇴위로 끝나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폴레옹 3세



현재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더이상 왕정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의 후손들인 오를레앙 가문 사람들은 프랑스의 왕위계승요구자 권리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들은 카페 가문의 명맥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프랑스의 왕위를 얻었던 보나파르트 가문 역시 프랑스 왕위계승 요구자 권리를 가지고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1. 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2016, 김영사)

2.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