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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4) 부르군트의 클로틸드 : 클로비스의 왕비 (두번째)

엘아라 2019. 5. 2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부르군트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쓰다보니 많아서 결국 두개로 나눴습니다.


프랑스의 왕비들....(4) 부르군트의 클로틸드 : 클로비스의 왕비 (두번째)




부르군트의 클로데킬디스

성 클로틸드

Saint Clotilde (c. 474–545)

 ClothildeClotildaClotildRotilde etc. 

(Latin: ChrodechildisChlodechildis),

성 클로틸드의 조상

성 클로틸드의 상징인 교회와 톨바이악 전투의 전리품을 들고 있는 모습




클로틸드는 클로비스와 결혼한 직후부터 자신의 믿음을 남편에게 전하려 노력했었다고 합니다. 클로비스는 원래 다신교를 믿었으며 이후에는 아리우스파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부르군트 왕국 출신의 아내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존재했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상황은 클로틸드가 자신의 종교를 자유롭게 믿고 남편에게 권유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클로비스


하지만 클로틸드는 가톨릭을 믿는 여성이었으며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려 노력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구원의 문제에서 남편이 이교도로 남아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내세에 대해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일듯합니다. 클로비스는 아마도 기독교 자체에 호의적 감정이 있었기에 아내의 종교도 존중해주었을 것입니다만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기독교적 여러 행위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수 있습니다.


투르의 게오르기우스가 쓴 글에 따르면 클로틸드는 아들이 태어났을때 기독교식으로 세례를 주어야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만 클로비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클로틸드는 남편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남편 몰래 아들에게 세례를 주게 되죠. 하지만 그 장남은 영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아내가 아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는 사실을 안 클로비스는 아내를 질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클로틸드는 둘째아들이 태어났을때도 남편의 허락에 관계없이 아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으며 이 둘째아들인 클로도미르(클로도메리우스,클로도메르) 역시 얼마후 아팠지만 그는 결국 살아남았으며 이후 클로틸드는 건강한 자녀들을 여럿 더낳았다고 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있는 클로비스와 클로틸드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클로비스는 많은 다른 개종자들처럼 신비주의적 체험을 한뒤 개종을 하게 됩니다. 그는 톨바이악(톨바이쿰) 전투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되죠. 일반적으로 톨바이악 전투는 496년경에 일어났다고 알려져있지만 몇몇 학자들은 다른 시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전투는 게르만 부족 연합이었던 알라마니 와 클로비스의 프랑스인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이 전투에서 클로비스가 승리하므로써 게르만인들을 복속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투 초기 클로비스는 패배의 위기에 직명하게 되었고 그는 위기의 상황에서 아내의 신에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믿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후 우세했던 알라마니가 후퇴하기 시작했고 클로비스가 그들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맹세에 따라 아내를 따라 세례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파리에 수도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톨바이악 전투


이 이야기는 역시 투르의 게오르기우스의 기록으로 외경형식으로 클로틸드의 삶을 쓴것이기에 클로비스가 정확히 어떤 기적을 경험했나는 잠시 고민해야할 문제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클로비스가 종교적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왕국을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계기로 이익이 되는 행동이었습니다.결국 가톨릭 교회는 로마를 계승할 사람을 축복할 권리가 있었으며 클로비스는 가톨릭을 믿음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호의를 얻게 되고 결국 명분마저 얻을수 있게 된것이었죠.



클로비스의 세례

16세기


클로비스는 511년 사망했으며 클로틸드는 남편이 죽은뒤 궁정에서 은퇴한뒤 투르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클로비스의 영지는 아들들에게 분할되어서 상속되게 되죠. 하지만 클로틸드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이를테면 아들이 그녀의 조카였던 부르군트의 국왕 지기스문트를 공격했을때 그녀는 아들의 공격이 그녀의 부모 즉 아들의 외조부모의 복수를 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그의 공격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르군트 왕국과의 투쟁에서 결국 그녀의 아들인 클로도미르가 사망하게 됩니다. 




클로틸드와 클로비스의 네아들들


게다가 클로도미르가 죽은뒤 상속문제가 일어나는데, 클로도미르의 세아들들에 대해서 숙부들이자 클로틸드의 아들들이었던 킬데베르와 클로타르가 그들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클로타르는 세조카둘을 죽였으며, 클로도알드만이 간신히 살아남아서 도망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클로도알드는 후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었으며 후에 할머니처럼 시성되어서 프랑스식으로 생 클로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하고, 손자들마저 비명횡사하는 것을 본 클로틸드는 궁정에서 떨어져서 완전히 수도원에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녀는 수도원과 교회를 세우면서 교회와 믿음에 좀더 집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클로틸드는 545년 사망했으며 그녀가 죽은뒤 그녀는 남편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손자들의 관앞에서 부르짖는 클로틸드

19세기


클로틸드가 죽은뒤 그녀는 곧 성녀로 공경받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삶의 행적에 따라 곤경에 처한 여성들의 수호성인이 되죠. 특히 노르망디에서 그녀에 대한 공경이 활발했는데 이전에 클로비스가 기독교를 믿지 않던 시절 그녀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던것과 관련해서 특히 남편에게 학대당하던 여성들이 그녀를 공경했다고 합니다. 성 클로틸드는 정교회와 가톨릭 그리고 성공회의 성녀로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은 6월 3일(프랑스에서는 6월 4일)이라고 합니다. 성 클로틸드의 상징은 왕관을 쓰고 교회를 들고 있는 모습과 톨바이악 전투의 기념품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왕비였으며 교회를 짓고 남편을 개종시키므로써 유럽대륙에 가톨릭을 정착시킬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일듯합니다.



성 클로틸드의 조상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