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베리아 반도만 근친결혼하는줄 알았더니 프랑스 왕가도 만만치 않군요.-0-;;
언제 한번 가계도나 한번 그려봐야겠습니다. 헐
마자리네트와 그 후손들...(7) 콩티 공 프랑수아 루이 드 부르봉 : 안나 마리아 마르티노치의 아들
프랑수아 루이 드 부르봉
콩티 공
François Louis de Bourbon,
le Grand Conti
(30 April 1664 – 9 February 1709),
훗날 그랑 콩티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프랑수아 루이 드 부르봉은 콩티 공이었던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과 마자랭의 조카였던 마리 안 마르티노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대부모는 고모였던 롱그빌 공작부인과 백부였던 "르 그랑 콩데"라고 알려진 콩데 공 루이 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두살때 사망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8살때 사망했기에 그와 그의 형인 콩티 공 루이 아르망은 백부였던 그랑 콩데가 키우게 됩니다. 어린시절부터 똑똑하고 지적이었으며 교육도 잘받았기에 프랑수아는 뛰어난 인물로 알려지게 됩니다.
콩데 공 루이 2세 드 부르봉 "그랑 콩데"
프랑수아는 일찍이 루이 14세와 마찰을 빚게 됩니다. 그와 그의 형인 콩티 공은 1683년 헝가리로 가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합스부르크 연합군에 참전게 됩니다. 루이 14세는 그때 자신의 사위가 된 콩티 공이 플랑드르 전선에 가길 바랬었다고 합니다만 루이 아르망은 동생과 함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하죠. 이런 상황에서 프랑수아는 루이 14세를 비난하게 되는게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가 전투 초기에 투르크 측에 섰기 때문입니다. 사실 프랑스는 오래도록 오스만 제국의 동맹이었으며 오래도록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관계였기에 이런 상황은 프랑스가 전쟁 초기 오스만 제국에 호의적이 되었던 것일것입니다.하지만 빈마저 함락당할뻔했었고 이교도가 제국의 심장부를 함락당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것에 대해서 프랑수아는 세명의 가톨릭의 수호자중 한명이었던 프랑스 국왕의 처신으로는 옳지 않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1685년 그가 프랑스로 돌아왔을때 잠시 백부인 그랑 콩데의 궁전에 돌아가지도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루이 14세
하지만 그의 형인 콩티 공이 아내를 간호하다가 천연두에 감염되어서 후손없이 사망하면서 그가 형의 뒤를 이어서 콩티 공 지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리고 콩티 공이 되면서 루이 14세는 그를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1686년 그에게 프랑스 왕가의 최고 훈장인 성령훈장을 부여했었습니다.
프랑수아는 백부의 보호아래 있었는데 아마도 그랑 콩데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조카를 자신의 손녀인 마리 테레즈 드 부르봉과 결혼시킵니다. 마리 테레즈는 남편을 매우 사랑했지만 프랑수아는 아내만큼 열정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리 테레즈 드 부르봉
콩데 공의 딸
콩티 공비
프랑수아는 아내에게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 더 눈을 돌렸는데 이를테면 아내의 올케였던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에게 반했고 그녀와 연애질을 했다고 합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은 루이 14세와 마담 드 몽테스팡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루이 14세의 정책에 따라 콩데공의 손자와 결혼한것이었습니다. 후에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의 딸인 마리 안 드 부르봉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프랑수아의 아이라고 여겨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동성연애도 어느정도 연결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바람둥이로 남녀 가리지않고 여러 사람들과 연애질을 했었습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루이 14세와 마담 드 몽테스팡의 딸
콩데 공비
프랑수아는 프랑스 군에 들어가 일을 했지만 공작보다 더 높은 콩티공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장군 이상의 지위를 올라가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사촌이었던 롱그빌 공작의 유언에 따라 그의 뇌샤텔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합니다만 이것은 롱그빌 공작의 누이였던 느무르 공작 부인이었던 마리 도를레앙-롱그빌과 분쟁을 하는 원인이됩니다.
1697년 루이 14세는 프랑수아에게 폴란드 왕위를 제안합니다.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시켜주겠다는 제안을 승락한 프랑수아는 폴란드로 가게 됩니다.하지만 프랑수아는 폴란드로 가는 것을 미적대는데 생시몽에 따르면 그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그가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에 대한 애정때문에 떠나기 싫어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프랑수아는 폴란드로 가게 됩니다만 이때는 이미 작센의 선제후가 폴란드 국왕이 된 상황이었으며 프랑수아는 프랑스로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는 1709년 병으로 사망했으며 어머니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프랑수아는 아내인 마리 테레즈 드 부르봉과의 사이에서 일곱아이가 태어났는데 그중 셋만이 성인으로 성장했고 결혼한 자녀는 장녀인 마리 안 드 부르봉과 아들인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이었습니다.둘다 친척이었던 콩데 가문의 사람들과 결혼했었습니다.
루이 아르망 2세 드 부르봉
콩티 공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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