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글안써지는것은 잘 몰라서겠죠..흑....
앞으로는 뭐랄까 전기는 꼭 다 읽고 시작해야겠습니다. ㅠ.ㅠ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7) 트루아 조약과 이후의 삶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점령한뒤 파죽지세로 프랑스를 점령해나가기 시작했었습니다. 이자보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가 내전을 멈추고 외적에 대항하길 바랬지만 결국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로 이것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잉글랜드와 동맹이 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길 바랬죠.
트루아 조약은 기본적으로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평화조약이었습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새로운 부르고뉴공작이 된 도팽의 육촌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선량공 필리프)였습니다. 평화조약은 국왕인 샤를 6세가 이자보와 함께 트루아로 가서 서명한 것이었지만 이자보는 이미 섭정으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기에 조약의 책임이 이자보에 있는 것은 부정할수 없습니다. 그리고이 조약의 두가지 문제가 바로 이자보에 대한 악명을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널리 퍼지게 만들었습니다.
트루아 조약 당시 샤를 6세와 이자보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이 조약에서 이자보는 아들인 도팽 샤를의 상속권 배제를 인정했으며, 상속자가 없는 프랑스 왕위에 대해서 사위가 되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계승을 승인했던 것입니다. 사실 중세시대 나라와 나라간의 조약은 양측 왕가의 결혼으로 보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두 왕가의 결합으로 평화를 보증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 트루아 조약의 보장으로 이자보와 샤를 6세의 막내딸인 카트린과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5세의 결혼이 성사된것이었죠. 사실 이런 보증은 왕위계승권리를 넘기는 것 역시 포함되는 경우가 있었기에 헨리 5세 역시 자신의 계승권을 보장받았기에 이 평화협정을 승인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도팽 샤를의 상속권이 배제되면서 직계 상속자가 없는 프랑스 왕가에서 결국 헨리 5세를 상속자로 승인하면서 조약을 체결할수 있었던 것이죠. 사실 당시 샤를을 제외한 상속자들의 경우 가장 강력한 상속자였던 오를레앙 공작은 잉글랜드의 포로로 잡혀있었고 샤를 6세의 숙부들쪽중 베리 공작은 남성후계자가 없었고 앙주 공작은 도팽 샤를을 지지하고 있었죠.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의 동맹이기도 했습니다.
카트린느와 헨리 5세의 결혼
문제는 바로 도팽 샤를의 상속권을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아들의 상속권을 배제한 이유로 그가 "사생아"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자보는 오를레앙 공작과 연인관계였으며 샤를은 국왕의 아들이 아니기에 상속권을 배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상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녀와 오를레앙 공작이 연인관계였다면 왜 연인을 죽인 부르고뉴 공작과 연합해서 아들의 권리를 뺏았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그녀가 죽은 후에야 나오는 이야기였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선량공)
도팽의 상속권을 배제한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이자보가 도팽의 적이었던 부르고뉴 공작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르고뉴 공작은 자신의 적이었던 도팽이나 아니면 오를레앙 공작 가문에서 왕위를 잇길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헨리 5세는 평화조약의 조건으로 점령한 노르망디 영지는 물론 이전의 플랜태저넛 가문과 아키텐의 영지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부르고뉴 공작이 차라리 자신의 영지를 뺀 모든 영지를 잉글랜드 국왕이 통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자보도 평화를 원했지만 아들의 상속권을 배제하는 것은 고민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는 선택권이 별로 없었죠. 이전의 일들때문에 아들인 도팽을 믿을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주변의 부르고뉴 공작 사람들이 압력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또 파리에서는 잉글랜드와의 평화를 원하는 이들도 많았죠. 이런 상황은 이자보가 결국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협정의 서명은 이자보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샤를 6세가 했지만 말입니다.
이 사건은 도팽 샤를의 세력을 매우 위축시켰습니다. 도팽과 아르마냑 파는 끝까지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하게 되죠. 반면 다른 많은 이들은 평화가 온것에 안도하기도 했었습니다.
트루아 조약이 맺어진후 이제 이자보는 파리에서 조용히 살아가게 됩니다. 이자보는 더이상 정치적 역할을 할필요가 없었으며 다른 이들을 중재할 필요도 없을듯했죠. 게다가 1421년 이자보의 딸인 카트린느는 아들인 헨리를 낳았고 아마도 이것은 모두에게 이제 잉글랜드의 국왕이 프랑스를 지배할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다시 1422년 사위인 헨리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다시 혼란해집니다. 미성년인 외손자 헨리가 헨리 6세로 즉위했으며 정치는 다시 섭정들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게다가 사위가 죽은지 육개월도 되지 않아서 이자보의 남편인 샤를 6세 마저 사망합니다. 이렇게 되자 아기인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마저 얻게 되죠. 이 상황은 다시 한번 혼란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자보는 의회에 모습을 드러냅니다만 그녀는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정치는 헨리 6세의 섭정이었던 베드포드 공작이 프랑스 통치에도 관여했었죠.
과부가 된 이자보는 많은 왕실 여성들처럼 궁정을 떠나 주변 사람들과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아들인 샤를이 다시 힘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이제 은퇴한 그녀에게는 더이상 관심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가 평화협정을 체결할때쯤인 1435년 9월 24일 사망했습니다.
이자보의 장례식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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