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4)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

엘아라 2019. 1.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에헤라 디야....

대충 자료를 읽었더니 글이 막 ...아하하...-0-;;;

해마다 이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는데 해마다 이러네요..ㅠ.ㅠ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4)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


오를레앙 공작이 암살된 직후 이자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부르고뉴 공작의 주장은 그녀명성을 해치는 것이었으며 더나아가서 그녀에게 직접적 위협이 되는 것이었죠. 이자보는 자신의 사위인 브르타뉴 공작 장을 불러들여서 파리를 보호하게 했고, 또 다른 왕실 인물들인 나폴리 국왕(앙주 공작의 아들로 샤를 6세의 사촌)과 샤를 6세의 숙부였던 베리 공작 역시 부르고뉴 공작이 파리를 점령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 상황은 외교적 문제로 해결되는데 부르고뉴 공작은 중재를 위해서 이자보의 친척이자 매제이며 또한 이자보의 사돈이었던 에노와홀란드질란드의 백작이었던 바이에른의 빌헬름 2세가 나서게 하죠. 결국 이자보는 부르고뉴 공작을 물러나게 만들었죠. 하지만 그녀는 이제 부르고뉴 공작과 좀더 사이좋게 지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잔 드 발루아의 결혼



이자보가 부르고뉴 공작에게 좀더 호의적이 된것은 사실상 오를레앙 공작측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재자로는 사실 두 세력이 비등비등할경우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오를레앙 공작이 암살당한뒤 오를레앙 공작측 사람들은 지도자를 잃었기에 세력이 약화됩니다. 게다가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 공작이나 이자보보다 훨씬 인기가 있었고 대중의 지지를 받는 부르고뉴 공작은 다시 한번 기회를 노릴수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왕권을 지켜야하는 이자보는 당연히 좀더 강한 세력인 부르고뉴 공작에게 호의적일수밖에 없을듯합니다. 게다가 이자보의 장녀인 이자벨이 죽은뒤 오를레앙 공작과의 연결고리는 더욱더 약해진 반면, 며느리가 이미 부르고뉴 공작의딸이었으며 또다른 딸인 마르셀을 부르고뉴 공작의 후계자에게 시집보냈기에 아마도 부르고뉴 공작과의 연결고리가 더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부르고뉴 공작 장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아르마냑 백작인 베르나르 7세의 딸과 재혼했고, 아르마냑 백작은 사위가 된 오를레앙 공작 측의 지도자가 됩니다. 베르나르 7세의 아내는 국왕 샤를 6세의 숙부인 베리 공작의 딸이었고 이런 상황은 아마도 베르나르 7세가 프랑스 궁정에서 영향력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누이가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아들과 결혼햇었지만 그는 아내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가 적극적으로 오를레앙 공작을 지지하게 만들었죠.


아르마냑 백작의 가담으로 오를레앙 공작 측은 다시 힘을 얻게 됩니다. 아마 이자보는 다시 한번 이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1411년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이 시작되게 되죠.당연히 아르마냑 파에는 오를레앙 공작과 아르마냑 백작 그리고 아르마냑백작의 장인인 베리 공작이 있었으며 그 반대편에는 부르고뉴 공작이 있었습니다.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본 다르마냑의 결혼식



내전이 시작되면서 두 강대한 국왕의 친척들이 서로의 권력을 두고 다투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국왕세력을 약해졌을 것입니다. 이자보는 자신의 아들이 둘을 해결하길 바랬지만 이자보의 아들인 루이는 상대적으로 두 공작들에 비해서 세력도 약했고 건강도 나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어느쪽으로 편을 들어야하는지 생각을 해야했습니다.처음에 이자보는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었지만 1413년 상황이 바뀌어서 부르고뉴 공작은 물러나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야했으며 아르마냑파가 파리를 장악하면서 그녀는 다시 오를레앙 공작과 아르마냑 파와 잘지내야하게 되는 상황이 되죠.


내전은 단순히 프랑스의 내정만 엉망으로 만든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르마냑 파와 부르고뉴 파 모두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외국세력이었던 잉글랜드를 끌어들이려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헨리 4세는 막 잉글랜드의 내정을 안정시켰습니다. 부르고뉴 공작은 물론 아르마냑 파 역시 잉글랜드가 자신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길 바랬으며 댓가를 주기로 했었죠. 당연히 잉글랜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었죠. 헨리 4세는 본격적으로 프랑스를 침공하지는 않았지만 댓가를 받고 프랑스의 지역들을 공격했을뿐만 아니라 이 핑계로 이전에 프랑스에 잃었던 영지들을 하나씩 야금야금 뺏아가고 있었습니다.



File:King Henry IV from NPG (2).jpg

잉글랜드의 헨리 4세


그리고 이런 상황은 프랑스와 이자보의 삶에 더욱더 치명적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