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3) 오를레앙 공작의 암살

엘아라 2019. 1. 1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정치상황이 너무 복잡해요.

대충 읽었더니 글이 안써져요...흑..

올해도 이렇게 대충 넘어가야는 모양입니다.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3) 오를레앙 공작의 암살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정치적으로 모두 날카롭게 변하게 됩니다. 특히 이자보가 오를레앙 공작을 좀더 지지하는듯한 상황이 되자 당연히 부르고뉴 공작측은 이자보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죠. 아마도 이런 불만은 아마도 이자보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퍼져나가게 했을 것입니다. 부르고뉴 공작이 파리를 공격할때쯤 파리에서는 오를레앙 공작과 이자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널리 퍼진 이야기였으며 부르고뉴 공작 측의 기록자들이 이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문에 또 다른 이야기와 합쳐져서 이자보가 부정한 여성이라는 후대의 인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적어도 이자보는 남편에게 충실한 여성이었으며 그녀의 남편이 정신을 차려서 그녀를 찾을때면 늘 남편과 함께 있으려고 했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오를레앙 공작이 죽은 뒤에 남편에게 정부인 오데트 드 샹디베르Odette de Champdivers를 남겨주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것은 그녀의 남편인 샤를 6세가 병이 더 심각해져서 아내를 못알아보고 쫓아낼뿐만 아니라 폭력까지 휘둘렀기에 남편곁에 더이상 있을수 없었기때문에 내린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샤를 6세와  그 곁에 있는 의사



자신의 권력에 오를레앙 공작이 방해가 된다고 여겼던 부르고뉴 공작은 결국 1407년  사람을 시켜서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1407년 11월 23일 집으로 돌아가던 오를레앙 공작은 파리의 거리에서 공격당해서 살해당합니다. 그가 죽은 직후, 부르고뉴 공작은 자신의 가담을 부인했지만 곧 다시 오를레앙 공작과 이자보 왕비의 불륜을 주장하면서 오를레앙 공작을 처벌한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죠. 사실 권력자였던 오를레앙 공작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으며 상대적으로 부르고뉴 공작이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살해당한 사람은 오를레앙 공작이었지만 부르고뉴 공작측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며 보상을 받아야한다고 억지를 쓰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이자보의 평판을 더욱더 나쁘게 했을 것입니다. 부르고뉴 공작이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한 이유로 이자보와의 불륜을 주장했기 때문이었죠. 이것은 사실이건 아니건 부르고뉴 공작이 주장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유였으며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주장은 이자보의 불륜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은 수단이었으며 결국 그녀의 평판을 땅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를레앙 공작의 암살


이자보의 평판과 별개로 이자보의 권력은 좀더 강화됩니다. 오를레앙 공작이 암살당한후 폭력사태가 지속되었으며 이런 상황을 제어할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은 국왕의 대리를 할수 있는 사람으로 바로 국왕의 후계자인 도팽 루이였죠. 하지만 루이는 미성년자였으며 결국 이자보가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정치 일선에 나설수 있게 된것입니다. 


물론 이자보는 나라가 찢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해당한 오를레앙 공작쪽 사람들이나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부르고뉴 공작쪽 사람들의 마찰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죠. 이 상황에서 이자보는 어떻게든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이런 노력은 이자보가 두 세력을 조정하려했으며 그녀는 상황에 따라 부르고뉴 공작 측과 오를레앙 공작 측의 편을 바꾸어가면서 지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아들인 루이의 왕위계승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도리어 이자보 개인의 평판은 더 나빠지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왜냐면 이자보가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할때면, 오를레앙 공작측에서 그녀에 대해 공격했었으며, 오를레앙 공작을 지지하면 부르고뉴 공작 측이 그녀를 공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이자보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생전에 루이의 장남인 샤를에게 자신의 장녀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였던 이자벨을 시집보냈습니다. 이자벨은 리처드 2세의 아내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평화조약을 위해서 리처드 2세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살해한뒤 이자벨은 잉글랜드에서의 혼담을 거절했고 1406년 프랑스로 돌아왔었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사촌인 오를레앙의 샤를과 결혼했던 것이죠. 하지만 1409년 이자벨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또 1409년에는 딸인 미셸을 부르고뉴 공작의 후계자인 필리프(후에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시킵니다. 이것은 아마도 부르고뉴 파와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미셸 드 발루아

이자보의 딸

부르고뉴 공작부인


이것은 아마도 이자보가 구심점을 잃은 오를레앙 공작측보다 부르고뉴 공작측을 좀더 지지한다는 의미이기도 할것입니다. 13살에 아버지를 잃고 오를레앙 공작이 된 샤를은 1409년 15살때 아내인 이자벨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왕가와의 연결고리도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이자보는 아마도 자신에게 좀더 이익이 되는 부르고뉴 공작과 연합해서 나라를 안정시키려 했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이자보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자보가 나라의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던 간에 그녀의 평판은 계속 나빠졌으며, 또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랑스는 내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