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에헤라 디야..-0-;;;
1415년 부터 잉글랜드와의 전쟁 이야기를 좀 하고 나서 대충 트루아 조약 이야기하고 나머지 삶을 이야기하고 자녀들의 이야기 그리고 대충 평가 정도로 하면 끝낼수 있을 듯합니다만 써봐야 할수 있는 것이죠..ㅠ.ㅠ
진짜 자료를 덜 읽고 쓰면 이모양됩니다.ㅠ.ㅠ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5) 잉글랜드의 침공 그리고 자녀들의 죽음
1413년은 이자보는 물론 프랑스 그리고 잉글랜드에게 전환의 계기중 하나가 됩니다. 먼저 부르고뉴 공작은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파리에서의 폭동을 지원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파리사람들은 부르고뉴 공작에 반대 세력인 아르마냑파의 도움을 원하게 되죠. 이렇게 부르고뉴 공작의 세력은 줄어들게 되고 대신 아르마냑파가 이제 파리에서 세력을 강화합니다. 이 상황은 이제 오를레앙 공작이 권력을 얻는 것을 의미했죠.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과 도팽 루이 사이는 이전부터 그리 좋지 않았는데 부르고뉴 공작의 딸을 아내로 얻었으며 부르고뉴 공작 인물이 측근이었던 루이가 아르마냑-오를레앙 파의 수장인 사촌을 좋게 볼리가 없었습니다.이런 상황은 왕실에 위협이 될수 있었기에 결국 이자보가 나서서 1414년 오를레앙 공작과 평화협정을 체결했었죠.
하지만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런던에서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1413년 3월 잉글랜드의 헨리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헨리가 헨리5세로 즉위한 것입니다. 강력한 기사였으며 야심가였던 헨리 5세는 프랑스 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5세
당연히 부르고뉴 공작은 이전의 동맹이기도 했었던 잉글랜드와 협상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국왕이된 헨리 5세는 내부의 안정을 이룬 많은 나라가 그랬듯이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증조부였던 에드워드 3세의 주장에 관심이 많았으며 프랑스와의 휴전을 정리하고 다시 공격하려합니다. 게다가 헨리 5세는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1415년 헨리 5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갑니다잉글랜드의 침공에 프랑스 왕족들과 귀족들은 내전을잠시 멈추고 외적에 대항하게 됩니다. 물론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와 우호관계에 있었으며 역시 쫓겨난 입장이었기에 전쟁에 관여하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생들인 브라반트 공작 앙투안이나 느베르 백작 필리프가 전투에 참전하는것을 말리지는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프랑스는 크게 패하게 됩니다. 상당수의 프랑스 중요 귀족들이 전사했는데 이를테면 참전했던 부르고뉴 공작의 두 동생들 모두 아쟁쿠르에서 전사했습니다. 오를레앙 파의 수장이기도 했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이때 잉글랜드에 포로가 되었죠.
아쟁쿠르 전투(1415)
그리고 2달뒤인 1415년 12월 이자보에게는 더욱더 큰 불행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녀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도팽 루이가 사망한 것입니다. 루이는 건강이 나빴었고 이때문에 아마도 아쟁쿠르 전투에 잠전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1415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었죠.
도팽 루이
이자보의 아들
아들을 잃은 이자보는 매우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영유아기에 아이들을 몇명 잃었었으며 1409년에는 딸인 이자벨을 잃었었죠. 하지만 루이는 후계자였으며, 성장해서 이제 미쳐버린 남편을 대신해서 나라를 이끌어갈것이라 믿었던 희망이었기에 그녀는 아들의 죽음에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루이가 죽은뒤 루이의 지위는 루이의 동생인 장이 이어받습니다. 새로 도팽이 된 장은 사실 어려서부터 이미 파리의 궁정을 떠나서 처가에서 머물렀습니다. 그의 아내인 자클린는 이자보의 친척이기도 한 질란드,홀란드,에노의 백작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였고 이에 장은 자클린와 결혼해서 장인의 영지를 이어받아 통치하기로 되어있었기에 결국 어려서부터 빌헬름 2세의 궁정에서 성장했었습니다.
에노의 자클린
새로 도팽이 된 장의 아내
도팽 루이의 죽음은 파리의 정치 상황을 혼란하게 만들었는데, 빌헬름 2세의 아내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딸로 부르고뉴 공작 장의 여동생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기에 그는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죠. 그렇기에 그는 사위이자 후계자인 장이 도팽이 되었다고 파리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의 군대가 파리로 오라고 주장했으며 결국 부르고뉴 공작의 군대는 파리로 가게 되죠.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국왕인 샤를 6세가 부르고뉴 공작의 군대를 두려워했으며 결국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를 프랑스 총사령관으로 만들게됩니다. 그리고 아르마냑 백작은 이에 서둘러 군대와 함께 파리로 갔으며, 스스로 부르고뉴 공작파와의 평화를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밝히게 됩니다.
아르마냑 파는 장이 도팽이 되면서 부르고뉴파가 득세할것을 우려했으며 이자보가 부르고뉴 파를 지지할것이라는 의심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자보는 아들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 대한 영향력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장은 어려서부터 홀란드의 궁정에 있었고 이것은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장인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들에게 영향력이 없는 이자보가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죠.
크리스틴 드 피장과 함께 있는 이자보 왕비
하지만 이런 장 역시 1417년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이자보는 아들이 아프다는 이야기에 의사를 보냈지만 결국 불분명한 이유로 사망했습니다. 이때문에 장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었죠.아무리 어려서 떨어져있었더라고 하더라도 자녀를 잃는 것은 어머니에게 큰 슬픔이었을 것이며 이자보는 루이에 이어 장마저 잃은것에 큰 상심을 했을 것입니다.
장이 죽은뒤, 이제 프랑스의 왕위계승자 지위는 막내아들이자 유일한 아들인 샤를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장이 장인의 영향력아래 있었던것처럼 샤를은 어머니인 이자보가 아니라 아르마냑 백작의 영향력아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르마냑 파는 이자보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합니다. 417년 4월 아르마냑파 사람들이 이자보와 샤를 6세가 머물고 있던 궁정으로 갔으며, 이곳에서 왕비의 측근중 한명이었던 루이 보르동 Louis Bosredon을 궁정에서 문란한 행동을 했다고 체포했으며 그 책임을 물어 왕비인 이자보를 감금하고 이자보 주변의 왕족 여성들을 떨어뜨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아르마냑파는 이자보에게서 부르고뉴 파와의 전쟁을 지속할수 있는 자금을 뜯어냈죠.
이렇게 이자보가 감금된 사이 프랑스 정치는 혼란의 정점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새해특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7) 트루아 조약과 이후의 삶 (0) | 2019.01.23 |
---|---|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6)부류고뉴 공작의 암살 (0) | 2019.01.22 |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4)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 (0) | 2019.01.18 |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3) 오를레앙 공작의 암살 (0) | 2019.01.17 |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12) 부르고뉴 공작 장 상 푀르 (0) | 2019.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