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6)부류고뉴 공작의 암살

엘아라 2019. 1. 2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흠흠흠...대충 끝나가고 있습니다. 아하하..-0-;;;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6)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


이자보가 아르마냑파에 의해서 감금당하자 그녀를 구하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르고뉴 공작 이었죠. 부르고뉴 공작은 도팽인 샤를이 확고한 아르마냑파인것과 국왕 역시 아르마냑파에 호의적이었기에 자신의 세력이 약해질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아지보를 구출해서 자신의 편에 서게하려했죠. 그리고 11월에 부르고뉴 공작에 의해서 풀려난 이자보는 이제 정치에서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중재자이자 두 세력에 힘을 실어주거나 아들인 도팽 루이(루이의 죽음으로 이자보는 이후 도팽들인 장과 샤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었습니다.) 가 대리하는 형식으로 그녀가 정치에 개입했었다면 이 사건 이후 그녀는 정치에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부르고뉴 공작 장 상 푀르


1418년 1월 이자보는 자신의 단독 섭정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샤를 6세는 아내를 후게자의 어머니로 후게자를 보호하고 이끌 권리를 부여했었죠.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그녀는 단독 섭정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었죠.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과 함께 파리로 갔으며 부르고뉴 공작은 결국 5월에 파리를 다시 점령했으며 아르마냑파를 쫓아낸뒤 국왕을 자신의 영향력아래 두게되죠. 그리고 이자보는 섭정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파리로 입성하는 부르고뉴 파의 군대들



권력의 전며에 나서게 된 이자보였지만 아들과 함께 평화 협정을 체결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샤를은 거절했고 이제 그는 확고한 아르마냑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권력을 갖길 바랬는데 도팽으로써 아버지의 섭정이 되길 원햇었죠.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자신의 강력한 반대파인 아르마냑파의 지도자인 도팽이 섭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갈등상황은 1419년 11월에 결말을 맞게 됩니다. 두 세력간의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서 양측의 군대는 만나게 되죠. 두 세력은 협상을 위해서 다리에서 만나서 협상을 진행하기로 합니다. 서로 긴장을 하면서 만나고 있는 상황에서 도팽의 측근이 도끼를 휘두르면서 부르고뉴 공작을 공격해서 살해했으며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도팽과 그 측근들은 그 자리를 빠져나가게 됩니다.도팽은 스스로 이 암살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모두들 그에 대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부르고뉴 공작 장의 암살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을 준 상황으로 평화협정을 위해서 만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했었죠. 이 사건은 샤를 6세가 자신의 아들인 도팽을 상속권에서 배제하는 경정적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트루아 조약에서 프랑스 왕위계승에서 도팽이 배제 당한것 역시 이 사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가 상속권을 배제한 아들의 상속권을 명확히 한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대의 이자보에 대한 악의적 이야기중 하나가 그녀가 스스로 아들의 혈통문제를 제기해서 아들이 사생아이기에 왕위계승을 배제했다는 것입니다.이 이야기는 그녀 생존시기에는 나오지 않았던 말이며 그녀가 죽은 뒤에나 나오게 된 말입니다. 이것은 그녀에 대한 악의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것일뿐만 아니라 아마도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손자로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루이 12세 이후에 더욱더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적어도 샤를 7세나 그의 아들인 루이 11세 그리고 손자인 샤를 8세의 경우 권위를 위해서 혈통문제를 이야기할리가 없기 때문이죠.


또 대외적으로도 이사건은 프랑스를 위협으로 몰아가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선량공 필리프)는 이제 확고한 잉글랜드의 동맹이 됩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선조의 영지인 노르망디 지방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제 나머지 프랑스 땅을 노리고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 사건이 일어나게 되자 결국 새 부르고뉴 공작은 확고하게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아르마냑 파와 도팽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 장이 암살된 다음해인 1420년 5월 21일 트루아에서 "트루아 조약"이라고 불리는 조약이 체결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