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9) 맺으며

엘아라 2019. 1. 2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흑 드디어 끝을 봅니다.

ㅠ.ㅠ 자료를 안 읽고 글을 쓰면 이렇게 된다고 깊이 반성중입니다.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19) 맺으며



대관식을 위해 파리로 들어가는 이자보 왕비

아마 이자보의 생애에서 절정이었던 시기일 것입니다.



이자보는 1435년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행복한 신부로 프랑스에 왔으며 자신에게 반한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광기로 인해서 그렇게나 사랑했던 아내를 못알아볼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낫길 바라면서 할수 있는 일을 다했을 테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죠. 



이자보의 남편 샤를 6세


이자보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열두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만 그녀보다 오래산 자녀는 수녀가 된 마리와 잉글랜드에 있던 카트린느와 사이가 나빠졌던 아들 샤를7세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로써 자녀들이 미리 죽는 것은 크나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녀가 의지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아들 도팽 루이의 죽음은 그녀에게 매우 큰 타격이었을 것입니다. 혼란한 시대에 나라를 쳥화롭게 만들것이라 기대했던 아들의 죽음이었을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후 장의 죽음과 사이가 너무나 벌어지게 되는 샤를 7세와의 관계 역시 이자보에게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도팽 루이

이자보의 아들


왕비로써 이자보는 안정된 나라를 아들에게 물려주길 바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두세력의 갈등과 외세의 침입은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넣었으며 결국 그녀가 나라를 팔아넘겼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트루아 조약에서의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



이자보의 삶은 이런 불운으로 인한 좌절로 지속된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모든것을 내려놓고 은퇴한 후의 조용한 삶에서 그녀가 평화를 얻었을수도 있습니다만 불운한 삶에 대해서 후회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삶이 어쨌든 간에 이런 불운한 상황은 그녀의 악명이 오래도록 퍼져나가게 만들게 됩니다. 그녀가 부정한 여성이어야 많은 이들이 정당성을 얻을수 있었기에 그녀는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들과 사통한 여성이되었야했죠. 트루아 조약에 서명한것으로 인해서 그녀는 나라를 팔아먹은 배신자의 이미지와 아들의 상속권을 배제한것때문에 나쁜 어머니라는 평가 역시 오래도록 받게 됩니다.


중세 여성이었던 이자보에 대해서 나름 자료가 많이 남아있던 이유 역시 그녀에 대한 비방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있죠. 이것은 강력한 두 세력의 중재자로써 역할을 했던 이자보의 삶의 결과가 아닐까합니다. 둘은 너무나 적대적이었고 이때문에 중재자인 이자보가 어떤 행동을 할때마다 자신들의 이해득실을 따져서 불리할 경우 그녀에 대해서 적대적인 행동은 물론 기록마저 그렇게 남겼을 것입니다.


오랜세월동안 이자보는 "재평가"받지 못하고 남아있었으며 여전히 오명속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자보는 왕비로 정치가로 어머니로 아내로 실수한 부분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가 어떤 실수를 해서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 이미 알고 있죠. 하지만 이자보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선택을 해야했을때 그녀가 할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알수가 없었을 것이구요.


내전과 외적의 침입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프랑스에 어떻게든 평화를 이루려고 했던 것이 이자보의 목표였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자보는 이 목표를 이룰수는 없었죠. 하지만 그녀가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모든 것으 다 책임져야하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적어도 극에 달하도록 권력 투쟁을 했던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  그리고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 파의 책임 역시 이자보보다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위협에도 개인적 복수와 권력을 선택했던 이자보의 아들 샤를 7세에게도 책임이 클것이죠.



크리스틴 드 피장에게서 책을 선물 받는 이자보 왕비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우연히 Gibbons, Rachel. (1996). "Isabeau of Bavaria, Queen of France (1385–1422). The Creation of a Historical Villainess".라는 논문을 읽게 되면서였습니다. 이자보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면서 여러가지 언급이 있었습니다만 정작 중요한 내용은 모두 프랑스어로만 적혀있어서 좌절하게 만들었던 논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찾다가 이자보에 대한 글인 Adams, Tracy. (2010). The Life and Afterlife of Isabeau of Bavaria.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를 발견했습니다. 이 책은 이자보의 삶을 정치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의 주된 참고문헌이기도 하죠.

이 두 자료 외에도 백년전쟁의 이해를 위해서 백년전쟁 1337-1453(수어드,최파일,2018)을 조금 읽기도 했습니다만 일단 주된 참고 문헌을 읽는것에 바빠서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외의 이자보의 가족 관계등은 모두 영문과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위키 피디어를 참고 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