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자보의 삶보다 주변 설명이 더 많죠..흑..중세 시대 여성들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자보의 삶에서 주변 정치 관계는 워낙 복잡해서 말입니다. -0-;;;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8) 초기 결혼생활과 이시기 정치 상황
이자보와 샤를 6세의 결혼은 매우 행복한 결혼으로 당대 모든 기록에서 결혼후 둘은 매우 열렬한 사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왕의 숙부들인 섭정들 역시 이 결혼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사실 부르고뉴 공작이 지지했던 결혼이었기에 당연히 둘이 열렬한 사이가 된것에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결혼직후 샤를 6세는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났으며 이자보는 시증조할머니가 되는 필리프 6세의 왕비였던 나바라의 블랑쉬와 함께 지내면서 프랑스식 궁정 예법이나 전통등을 배우게 됩니다. 나바라의 블랑쉬는 필리프 6세의 두번째 아내로 그와 무려 거의 40살이나 차이가 났었습니다. 그녀는 20살때인 1350년 필리프 6세와 결혼했지만 결혼한 그해 필리프 6세는 사망했으며 그녀는 유복자인 딸 잔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의붓아들인 장 2세는 블랑쉬보다 11살이나 더 많았으며 의붓손자인 샤를 5세는 그녀보다 여덟살밖에 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자보는 벵센성을 자신의 거처로 마련했으며 샤를은 자주 아내를 찾아오게 됩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나바라의 블랑쉬 그리고 둘의 딸인 잔
열렬한 부부였던 이자보와 샤를 6세 사이에서는 곧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결혼 다음해인 1386년에 첫아이이자 아들인 샤를이 태어난것으로 시작해서 이자보는 1407년 막내인 필리프를 낳을때가지 무려 12명의 아이들을 계속 낳았습니다. 중세시대 아이들이 많은 것은 부부간의 사이가 좋던것으로 여겨졌었으며 계속해서 아이들을 낳을만큼 부부는 서로 가까운 사이기도 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샤를 6세의 병이 발병한 뒤에도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샤를 6세는 후에 발병하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었고 폭력을 행사했기에 이자보 역시 알아보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아내로써 남편 곁에 남았으며 샤를 6세 역시 정신이 들때면 늘 아내를 찾았기에 아이들이 계속 태어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자보는 결혼 초기에는 그냥 평범한 아내로 남편인 국왕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는 서서히 복잡해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샤를 6세의 섭정들은 샤를 6세가 14살이 될때 은퇴를 하고 샤를 6세가 친정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손에 잡은 섭정들은 이 시기를 계속 늦추게 되죠. 어린 나이였을때는 상관이 없었겠지만 이제 성인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있는 샤를 6세는 점차 숙부들이 섭정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숙부들의 권력은 사실상 샤를 6세가 가져야하는 권력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은 자연스럽게 국왕인 샤를 6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만 이미 성인이 될때가지도 권력을 놓치 않으려던 숙부에게 샤를 6세가 불만을 품지 않을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자보 역시 아마 이때 남편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물론 그녀 스스로 정치적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그저 남편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중세 여성이었을 테지만 말입니다. 사실 그녀의 결혼이나 에노와 같은 친정쪽 혼맥때문에 그녀는 결혼했을 당시 부르고뉴 공작에게 호의를 가졌을 것입니다.
위쪽 그림은 사냥중인 샤를 6세 이고 아랫쪽은 그의 왕비인 바이에른의 이자보
하지만 그녀가 결혼한 그해, 외할아버지인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외삼촌들이 어머니의 사촌이자 이모부였던 지안 갈레아초에게 연금당하고 권력과 영지의 상속권을 포기하라는 강요를 당합니다.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이자보가 결혼한 그해 사망했는데 당시 베르나보 비스콘티가 독살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습니다. 그런데 지안 갈레아초는 프랑스와 연결고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첫번째 아내인 이자벨이 바로 샤를 6세의 고모였던것이죠. 그리고 이런 연결고리는 그가 프랑스에서 동맹을 쉽게 구할수 있게 했습니다. 지안 갈레아초는 막강한 금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금전력은 많은 이들이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상황을 만듭니다. 그중에는 바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도 있었죠. 그는 지안 갈레초에게 돈을 빌렸으며 당연히 빚을 갚아야한는 처지인 부르고뉴 공작은 매제이기도 했던 지안 갈레아초와 잘 지내길 바랬을 것입니다. 또 지안 갈레아초는 자신의 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결혼시키길 바랬습니다. 이것은 루이에게도 유리한 일이었는데 발렌티나가 결혼을 위해서 가져올 지참금이 엄청날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
밀라노 공작
이자보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을 쫓아낸 지안 갈레아초에게 호의적일수는 없었으며 결국 지안 갈레아초에 호의적이었던 부르고뉴 공작에게 반감을 가질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 지안 갈레아초 진영에는 이자보 말고도 또 다른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아르마냑 백작이었던 장 3세였습니다. 장 3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베아트리스는 이자보의 외삼촌이었던 카를로 비스콘티와 결혼했었으며 지안 갈레초에 의해서 쫓겨났던 인물입니다.그는 간신히 외가족인 베로나로 도망갈수 있었으며 이때문에 장 3세는 지안 갈레아초에 불만을 품게 된것이었습니다.
아마 1389년경 샤를 6세는 숙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친정을 시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이전에 아버지의 측근신하였던 인물들을 불러들여서 자신의 신하들로 일하게 했었죠. 그리고 이런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내인 이자보의 대관식을 치루게 합니다. 아마도 샤를 6세는 아내의 대관식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이 확고하다는 것을 증명해보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관식 직전에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발렌티나 비스콘티가 2년간의 약혼기간을 끝내고 드디어 결혼을 합니다. 둘의 결혼이 늦어진것은 교황의 대립때문이었는데 오를레앙 공작과 발렌티나 비스콘티는 사촌간이었기에 반드시 교황의 사면장이 필요했었는데 정치적 문제때문에 이것이 늦어졌던 것이죠.
대관식 직전에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의 화려한 결혼식이 치루어졌으며 그 뒤를 이어서 다시 이자보의 화려한 대관식이 치뤄지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히 국왕의 권력에 대한 확고함을 보여줄수 있는 행사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겼었다고 합니다.
이자보의 파리 입성
하지만 이런 화려함 뒤에는 여전히 정치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죠. 샤를 6세와 오를레앙 공작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의 미묘한 갈등은 물론 친척이자 동서지간이되었지만 또 묘하게 정치적으로 반대입장이 되어버린 이자보와 발렌티나의 갈등 역시 숨어있었을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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