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중세시대는 가장 큰 문제가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거든요. 특히 어린시절...
게다가 여자들이 대부분 일찍 시집가서 어린시절이랄것도 별로 없습니다.
어쨌든 일단 써보긴하는데 ..흑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5) 부모
이자보의 아버지인 슈테판 3세는 바이에른의 공작 슈테판 2세의 아들이자 황제 루드비히 4세의 손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자보의 어머니는 밀라노의 통치자였던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이었죠. 둘의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의 결혼 문제는 티롤 상속 문제와 연결됩니다.
슈테판 3세의 백부이자 황제 루드비히 4세의 장남이었던 브란덴부르크의 마르크그라프이자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루드비히 5세는 티롤의 상속녀였던 마르가레테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리고 둘사이에서는 아들인 마인하르트만이 남았죠. 루드비히 5세는 1361년 사망했으며 그의 외아들이었던 마인하르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았지만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결국 1363년 사망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드비히 5세의 동생들인 바이에른의 공작들은 조카인 마인하르트의 상속영지를 자신들이 물려받아야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상속영지라는 것에 마인하르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상속 영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티롤의 여백작 마르가레테에게서 물려받을 영지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르가레테의 영지를 자신들이 나눠갖겠다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바이에른의 슈테판 2세의 씰
이자보의 조부
이에 티롤의 마르가레테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티롤의 상속녀로 티롤에 대한 모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첫번째 남편이 자신의 권리를 제한하려한것에 불만을 품고는 그를 쫓아내기까지 했었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동생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바이에른 공작들은 이에 대해서 무력으로라도 티롤을 장악하려합니다. 왜냐면 그만큼 티롤지방이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죠. 티롤 지방은 중세시대 이탈리아와 독일을 연결하던 중요한 지역중 하나였고 특히 황제가 대관식을 올리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곳이었기에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이에른 공작들은 이 지역을 놓칠수 없었던 것입니다.
티롤의 여백작 마르가레테
이자보의 백모
마르가레테는 시동생들이 무력으로라도 자신의 영지를 뺏으려하자 가만히 두고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사돈 가문이자 시집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과 경쟁관계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기게 됩니다. 마르가레테의 아들인 마인하르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성과 결혼했었으며, 마르가레테는 며느리의 오빠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에게 티롤지방의 권리를 넘겨버립니다. 물론 그녀의 생전에는 티롤에 그녀의 통치 권리를 보호해준다는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를 넘겨받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티롤 지방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
재미난 것은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타데아가 결혼한 다음해에 루돌프 4세의 동생에게 둘째딸인 베르데를 시집보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슈테판 2세가 티롤 인근 지방의 통치자였던 베르나보 비스콘티와의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면 베르나보 비스콘티 역시 동맹이 필요했습니다.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와 이탈리아 북부의 막강한 가문으로 성장하면서 이 지역과 연결되는 프랑스,신성로마제국,교황과 마찰을 빚게 됩니다. 특히 1350년대 후반에서 13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일련의 황제, 프랑스 국왕, 교황등과의 갈등은 그가 강력한 동맹을 얻길 원하게 되죠. 비스콘티 가문은 전통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나 독일 지역의 세력과 연합했었는데 당시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황제 카를 4세와도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황제와 동맹을 맺을수 없었죠. 결국 그는 황제 카를 4세의 가문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과 경쟁관계였던 비텔스바흐 가문과 동맹을 맺을 기회를 얻자 그것을 놓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티롤의 마르가레테의 첫번째 남편이 바로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마르가레테가 첫번째 남편을 쫓아내고 경쟁관계에 있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남성을 두번째 남편으로 선택한것이기도 합니다.)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그의 아내인 베아트리체 레지나 델라 스칼라
결국 동맹이 필요했던 두 사람은 서로 필요했기에 둘의 자녀를 결혼시키면서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딸들의 지참금을 엄청나게 해줬는데 타데아 비스콘티의 지참금은 10만 공드 듀캇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골드 듀캇은 3.5g의 함량 99.47%의 순금 동전을 의미하는 것일듯합니다. 그러면 금이 350kg 정도로 현재 금시세로도 160억이 넘네요. 하여튼 엄청난 지참금이었던것입니다.)
15세기 베네치안 골드 듀캇
결국 이렇게 많은 다른 중세 통치 가문들의 경우처럼 이자보의 부모인 슈테판3세와 타데아 비스콘티는 1364년 결혼하게 됩니다. 부부간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아마 쉬운 생활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단 서로 다른 외국인인 이들이 정략결혼을 하는 경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 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슈테판 3세와 타데아 비스콘티는 나이차가 16살이나 차이가 났기에 이런 나이차 역시 어쩌면 부부간의 생활을 그다지 편안하게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커보입니다. 또 타데아는 바이에른 지역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했는데 특히 바이에른 지역의 날씨는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자주 여행을 떠나야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여행은 단순히 건강때문일수도 있었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을 피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슈테판 3세와 타데아 비스콘티 사이에서는 세아이가 태어나는데 그중 두 아이인 루드비히와 엘리자베트(이자보)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바이에른-앙골슈타트의 공작 루드비히 7세
타데아 비스콘티의 건강은 늘 나빴는데 특히 1380년 12월 고향인 밀라노를 방문했다가 다시 병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바이에른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병이 낫지 않았고 열이 계속 되는 등의 상태였다가 결국 1381년 사망하게 됩니다. 이때 이자보는 겨우 11살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중세 시대 왕가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직접적 보살핌을 받지 않았고 그렇기에 이자보의 일상적인 삶에서 어머니의 부재는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죽음은 예민하게 받아들이룻 있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훗날 좋은 어머니로 남으려 노력했던것도 어린시절의 어머니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자보의 어머니가 죽기 전 비텔스바흐 가문과 비스콘티 가문의 결혼이 또하나 진행됩니다. 이자보의 외할아버지였던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여전히 두 가문의 유대를 확인하길 원했으며 이때문에 아내를 잃었던 이자보의 숙부인 프리드리히와 이자보의 이모였던 마그달레나 비스콘티가 결혼하게 되죠. 이 숙부인 프리드리히는 이자보의 살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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