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6) 혼담과 결혼

엘아라 2019. 1. 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0-;; 한달 내내 하는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헐..-0-;;;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 (6)혼담과 결혼


이자보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지게 되는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는 1370년 뮌헨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훗날 독일식 이름인 엘리자베트와 프랑스식 이름인 이자벨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자벨의 애칭쯤으로 여겨질수 있는 "이자보"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자보같이 높은 신분의 여성이 정식이름으로 기록되지도 않는 것은 어쩌면 그녀에 대한 악의적 평판이 널리 퍼져갔거나 적어도 그녀를 지칭하면서 악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라 추정할수 있다고 합니다. 


이자보의 어린시절의 삶은 다른 많은 중세 여성들 처럼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어린시절 어머니를 잃었으며 딸을 멀리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있었던것으로 봐서 아버지와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며, 오빠와도 관계가 원만했다정도만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녀들을 잘 돌보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려했던 것으로 봐서 어린시절 어머니의 죽음 외에는 특별한 어려움도 없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프랑스로 시집올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오랜 전투 상황과 그녀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으로 비스콘티 가문과 혈연관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이에른 공작 가문의 문장



프랑스는 후에 100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사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내부 사정에 의해서 잠시 중단 되기도 하고 다시 이어지기도 했던 전쟁이었기에 오래 끌었던 것이었죠. 


먼저 장 2세의 경우 잉글랜드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몸값을 지불해야했는데 그것을 다 마련하지 못했고 결국 아들들을 인질로 붙잡아 놓고 프랑스로 귀환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인질이 잉글랜드에서 탈출하자 기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다시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었고 결국 잉글랜드에서 사망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장 2세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서 프랑스는 비스콘티 가문과 연결고리를 마련합니다. 밀라노의 공동 통치자였던 갈레아초 2세에게서 원조를 받는 대신 장 2세의 딸인 이자벨에게 영지를 부여해서 갈레초아 2세의 아들인 지안 갈레아초에게 시집보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비록 이자보의 외할아버지인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기안 갈레초아가 갈등을 빚기는 했지만 이전에 기안 갈레초아가 두번째 아내로 이자보의 이모인 카타리나와 결혼했으며 이런 상황은 아마도 이자보가 비스콘티 가문과 혈연 관계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프랑스에서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장 2세


또 이자보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이라는 것과 그녀의 증조할아버지가 황제 루드비히 4세였다는 사실 역시 프랑스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오랜 전쟁을 치루는 동안 유럽의 여러 세력들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이려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상대는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죠. 문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선출직이었으며 독일내 제후들이 이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룩셈부르크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이를테면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장남으로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요한(얀)은 프랑스측의 동맹으로 전쟁에 참전했었으며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하기도 했었습니다. 샤를 5세의 어머니는 보헤미아의 요한(얀)의 딸이기도 했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가 룩셈부르크 가문과 경쟁관계인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혼담에 관심을 갖는것은 이상하게 여겨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와 룩셈부르크 가문은 샤를 5세때쯤이 관계가 삐걱대고 있었습니다. 황제 카를 4세는 프랑스의 국왕 샤를 5세의 외삼촌이긴 했지만 그는 잉글랜드와 딸의 혼담을 추진했으며 이 상황은 잉글랜드의 적이었던 프랑스 측에서 불만으로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샤를 5세는 역시 룩셈부르크 가문과 경쟁관계인 다른 독일 가문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을 것이며 당시 룩셈부르크 가문의 최대 경쟁자이기도 했던 비텔스바흐 가문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황케 카를 4세

프랑스의 국왕 샤를 5세의 외삼촌



그리고 에노와 홀란드 질란드 백작령을 이자보와 같은 가문 출신이었던 비텔스바흐 공작이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혼담의 고려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이자보의 종조부들이었던 빌헬름, 알브레히트,오토는 황제 루드비히 4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이자 에노와 홀란드 질란드등의 상속녀였던 마르가레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빌헬름과 그의 뒤를 이은 알브레히트는 아버지의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물려받았지만 역시나 어머니의 상속영지를 물려받고 이곳을 통치하게 됩니다. (마르가레테의 여동생인 필리파는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이기도 했습니다.) 이들 영지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공작의 영지 인근이었으며 이들은 역시 중요한 동맹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샤를 5세는 딸인 마리를 이 에노지방등을 통치하는 바이에른 공작들중 한명과 딸을 결혼시키고 싶어했었다고 합니다.


또 샤를 6세의 섭정중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했던 숙부였던 부르고뉴 공작 역시 브라반트 공작령의 상속문제 때문에 이 에노 등의 지방을 통치했던 바이에른 공작과의 동맹을 원했었으며 실제로 자신의 후계자와 딸을 알브레히트의 후계자와 딸과 결혼시키는 등의 일을 했었기에 비텔스바흐 가문과 프랑스 왕가의 통혼에 적극적이기도 했었습니다.



에노등의 백작이었던 바이에른의 알브레히트 1세의 모습(왼쪽아래)와 문장이 그려진 문서





결국 이런 정치적 배경은 이자보와 프랑스 국왕의 혼담이 진행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이자보와 샤를 6세와의 혼담이 진행되게 된 계기는 바로 이자보의 숙부였던 바이에른-란트슈트의 프리드리히와 관계가 깊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숙부인 알레히트의 궁정으로 갔으며 1383년에는 프랑스측에 가담해서 잉글랜드와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연히 바이에른 공작들과의 동맹을 추구했었던 프랑스측 - 특히 부르고뉴 공작은 아마도 이 프리드리히와의 연결고리를 원했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정치적 수단도 있었을뿐만 아니라 매우 부유한 인물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당시 프리드리히에게는 프랑스 측과 혼담을 진행할 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이자보의 이모인 마그달레나 비스콘티이기도 했었기에 결국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조카인 이자보를 신붓감으로 추전하게 됩니다. 


이자보의 아버지인 슈테판 3세는 딸을 멀고먼 프랑스로 시집보내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지만 결국은 딸이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 것이었으며 여러가지 가문의 동맹관계도 중요했었기에 딸이 프랑스로 가는 것을 승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 협상이라는 것이 다 되었다가도 깨질수 있는 것이었기에 외부에는 이자보가 순례여행을 간다고 알렸으며 프랑스에 있는 숙부와 종조부의 궁정을 거치는 것 역시 혹시 혼담이 갑작스럽게 깨질 경우에 그녀의 평판을 지킬수 있는 중요한 명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자보는 일단 종조부의 궁정이 있는 에노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 없이 무사히 프랑스 국왕과의 혼담이 잘 진행되게 됩니다. 특히 알브레히트의 궁정에 머물면서 이자보는 프랑스식 스타일의 옷차림과 궁정 예법등을 배우게 됩니다. 알브헤히트의 아내였던 브리크의 마르가레테가 이자보에게 가르쳐줬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자보가 에노에 갔을때 알브레히트의 자녀들은 부르고뉴 공작의 자녀들과 결혼을 했거나 하기 직전이었을 것이며, 이때문에 이자보가 에노로 가서 몇달간 머문것은 외국인 왕비가 될 이자보에게 프랑스 궁정에 대해서 익숙해질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1385년 7월 이자보는 아미엥으로 갔으며 이곳에서 프랑스의 국왕 샤를 6세를 만나게 됩니다. 샤를 6세는 아름다운 이자보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당시 이자보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했고 비록 프랑스 식 스타일을 배우긴했다지만 세련되었다고 할만큼이지는 못했으며 또 당대 이상적인 미인형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샤를 6세는 이자보를 정말 좋아했으며 아마도 이자보 역시 남편에 대해서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마음에 안들어도 어쩌겠습니까 저정도 일이 되면 그냥 결혼해야죠 -0-;;) 그리고 둘은 만난지 3일후인 1385년 7월17일 결혼식을 올렸고 이자보는 이제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대관식을 치루는 샤를 6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