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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207) 마리아 피츠허버트 : 조지 4세의 정부(?)

엘아라 2018. 12. 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조지 3세 아들들은 진짜...-0-;;;;;;;

이 복잡한 관계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갈등중입니다.


특히 조지 4세와 이 피츠허버트 부인의 관계는 좀 애매하다죠. 둘이 비밀리에 결혼햇다는 소문까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피츠허버트 부인은 가톨릭 교도라서 의회가 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결혼했다면 조지 4세의 왕위계승권이 박탈당할것이었기에 조지 4세는 그녀와의 결혼을 부인했다고 합니다만....-0-;;;

어쨌든 일단 여기에 넣어봅니다. -0-;;;


정부들과 그 후손들...(207) 마리아 피츠허버트 : 조지 4세의 정부(?) 



마리아 피츠허버트

Maria Anne Fitzherbert 

(née Smythe, previously Weld; )

(26 July 1756 – 27 March 1837) 



일반적으로 피츠허버트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리아 앤 스미드는 1756년 월터 스미드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귀족 가문 출신으로 마리아는 파리에 있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1775년 마리아는 자신보다 16살 많은 부유한 가톨릭 교도였던 에드워드 웰드와 결혼합니다만 그는 결혼한지 석달만에 사망합니다. 문제는 에드워드 웰드가 너무 일찍 죽었기에 이전의 유언장을 바꾸지 않았고 그의 재산 모두는 그의 동생이 물려받았으며 마리아는 웰드 가문에서 어떤 경제적 지원도 못받게 되죠. 결국 이런 상황은 마리아가 다른 남편을 찾아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첫번째 남편이 죽은 3년후에 그녀는 자신보다 10살이 많은 토마스 피츠허버트와 재혼합니다. 그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을 한명 낳지만 어려서 죽었으며 그녀의 남편 역시 1781년 사망합니다. 마리아는 남편이 죽으면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아마도 편안한 생활을 할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두번이나 과부가 된 마리아는 이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이런 상황은 그녀가 런던 사교계에 나갈수 있게 했을듯합니다. 돈많은 과부에게 관심을 갖는 가난한 귀족들은 여전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1784년 봄 그녀는 자신보다 여섯살 어린 웨일즈 공 조지를 소개 받게 됩니다. 



웨일즈 공 시절의 조지 4세

1782년경



웨일즈 공은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으며 열렬히 쫓아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785년 12월 15일 마리아의 집에서 웨일즈공과 마리아는 마리아의 친척들이 증인으로 선 가운데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매우 문제가 많은 결혼이었는데 가장 먼저 마리아가 가톨릭 교도였기에 당시 영국에서는 왕위계승자의 가톨릭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했었습니다. 이 결혼이 정식으로 인정되면 웨일즈공의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게 될 위기였죠. 또 하나는 웨일즈 공과 피츠허버트 부인의 결혼은 아예 법적으로 정식으로 인정받을수 없는 결혼이기도 했었습니다. 왜냐면 1772년 웨일즈 공의 아버지인 조지 3세는 법으로 왕실 가족들의 결혼은 가문의 수장인 국왕의 허락이 있어야한다고 명시했었습니다. 왜냐면 조지 3세는 그의 동생들과 아들이 통치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지 않은 것에 화를 냈으며 가문의 법을 정식 법률로 만들어서 결혼을 무효화 시키려했었습니다. 하지만 1772년 이전에 결혼한 왕자들은 결혼이 모두 인정되는 결과를 낳아서 조지 3세를 열받게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피츠허버트 부인과 웨일즈 공의 결혼은 법령 이후에 결혼한것이기에 당연히 국왕의 허락이 없다면 무효화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웨일즈 공 조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피츠허버트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을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 결국은 법적으로는 아무런 의미없는 결혼이었기에 결국 조지 3세가 안다면 무효화 될것이었으며 그의 계승권은 지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웨일즈공은 마리아를 자신의 진짜 아내로 여겼었다고 하지만 결국은 법적으로 본다면 그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고, 아내의 재산으로 편안하게 살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던것이었죠. 



피츠허버트 부인


1794년 마리아는 웨일즈공으로부터 헤어지자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경제적 상황때문이었는데 조지 3세와 의회는 왕자들이 결혼하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살면서 후계자를 낳지 않는 것에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웨일즈공의 빚을 갚아주는 대신 통치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죠. 그리고 조지는 이에 굴복하고 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과 결혼합니다. 물론 이 결혼은 실패했으며 조지와 캐롤라인은 곧 서로 별거했고, 조지는 또 다른 정부였던 저지 백작부인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아마도 웨일즈공의 정치적 이유때문에 그냥 평범하고 조용히 살았던듯합니다만 그와의관계는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던듯합니다. 


조지 4세가 왕위를 계승한 직후, 그는 마리아에 대해서 매우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녀의 존재는 그의 통치에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내인 캐롤라인 왕비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동정심과 계승자인 샬럿의 죽음은 그에게 정치적으로 불리한것이었고 이에 더해서 가톨릭 교도인 피츠허버트 부인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은 그를 궁지에 모는 것이었죠.


조지 4세는 죽기 직전에 마리아가 보낸 편지를 읽고서는 베개밑에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언으로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그녀의 아이 미니어처 그림을 함께 묻어달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조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채 자신의 편지에 답을 하지 않은 것에 매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조지 4세

1820년대


조지 4세가 죽은뒤, 그가 마리아와 주고받은 모든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동생이자 후계자였던 윌리엄 4세가 이를 모두 없애버립니다. 마리아는 국왕에게 조지 4세와 자신의 결혼 증명서가 있다고 이야기했고 윌리엄 4세는 추문을 막기 위해서 그녀에게 공작령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과부들이 입는 상복을 입는것과 하인들에게 왕실 시종들이 입는 옷을 입는 것을 요구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조지 4세의 아내라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상징적인 의미였을 것입니다.



마리아 피츠허버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