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스코틀랜드의 왕비들....(36) 마리 드 기즈 : 제임스 5세의 왕비 (네번째)

엘아라 2018. 9.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마리 드 기즈 마지막이군요.

이제 슬슬 새해특집 자료를 찾아야겠습니다..-0-;;;

생각해둔 사람이 있는데 결정적으로 자료를 다 날려서..-0-;;; 일단 책이 있는것 같으니 책부터 사야할듯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왕비들....(36) 마리 드 기즈 : 제임스 5세의 왕비 (네번째)






마리 드 기즈

Mary of Guise 

(22 November 1515 – 11 June 1560)

스코틀랜드의 왕비로써의 마리 드 기즈의 문장


마리 드 기즈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후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섭정이었던 애런 백작을 실각시키고 그자리에 남편의 사생아 아들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로 대체합니다. 그리고 1554년에는 그녀 스스로가 섭정의 자리에 오르게됩니다.

마리 드 기즈가 섭정이 되면서 가장 이익을 본 쪽은 바로 프랑스와 마리 드 기즈의 친정식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후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제임스 스튜어트

머레이 백작,

제임스 5세의 사생아 아들, 메리 스튜어트의 이복오빠



마리 드 기즈는 자신이 섭정이 된 후에 스코틀랜드 내의 여러 문제들에 관여합니다. 이를테면 서덜랜드 백작과 머레이 백작 가문 사이의 문제에 개입해서 서덜랜드 백작을 지원하는등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지역을 다니면서 역시나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마리 드 기즈가 자신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만들고 그들의 적들을 없애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더욱더 강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 드 기즈는 혼란한 스코틀랜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종교개혁과 왕위계승문제가 결합된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세력이 점차 커지게 됩니다. 초기에 마리 드 기즈는 개신교도들을 어느정도 용인했는데, 마리 드 기즈는 친프랑스 정책을 펴려했었으며 개신교도들의 지지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블러디 메리(메리 1세, 메리 튜더) 통치기였으며 개신교도들이 잉글랜드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1558년 변하게 됩니다. 1558년 마리 드 기즈의 딸이었던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 왕위계승자였던 도팽 프랑수아와 결혼했으며 그해 말 블러디 메리가 사망하고 그녀의 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엘리자베스의 적자 지위를 걸고 넘어지면서 며느리인 메리 스튜어트는 적자로 잉글랜드 왕가의 후손이기에 잉글랜드 왕위계승을 주장하게 됩니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주장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수도 있었지만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으며 이것은 결국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가 스코틀랜드를 경계하고 결국 스코틀랜드 내의 개신교를 지원하는 계기가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와 프랑수아 2세


이렇게 되자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마리 드 기즈는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문제는 마리의 주요 지지세력들이었던 이들도 개신교도였으며 이런 상황은 그들이 마리를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프랑스군이 오면서 개신교도들의 반란은 진압되는듯했지만 잉글랜드의 개입으로 또 상황이 변하게 됩니다. 결국 잉글랜드와의 평화조약을 체결해야했고 이때 프랑스인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떠나는 것이 조건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마리 드 기즈는 평화조약후 다시 한번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여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심하게 앓게 되었고 결국 1560년 6월 사망하게 됩니다. 마리 드 기즈의 관은 프랑스로 옮겨졌으며 딸인 메리 스튜어트가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에서 장례식이 열렸고 랭스에 있는 수도원에 묻혔다고 합니다. 마리 드 기즈의 묘는 프랑스 대혁명때 파괴되었습니다.


마리 드 기즈는 당대에 매우 인기가 없었었는데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가톨릭으로 친 프랑스 정책을 펼쳤기에 당대에 개신교도들이 세력을 얻었고 이를 잉글랜드에서 지원했기에 그녀의 정적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을 것이며, 외국인 왕비에 대한 편견 역시 더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가 된 딸 메리 스튜어트를 위해 스코틀랜드가 친 프랑스 정책을 펴도록 계속 노력을 했으며 스코틀랜드 내의 혼란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던것이 아닐까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츨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