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스코틀랜드의 왕비들...번외편(8)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 : 메리 여왕의 남편

엘아라 2018. 10.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메리 여왕을 해야하나 남편들을 해야하나..고민하다가 남편들 하기로 했습니다.

메리 스튜어트는 자료가 많으니까요 ^^;;;;


스코틀랜드의 왕비들...번외편(8)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 : 메리 여왕의 남편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

Francis II

François II

(19 January 1544 – 5 December 1560)



프랑스의 국왕이자 메리 스튜어트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의 앙리 2세와 그의 아내인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11년만에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의 이름을 따서 프랑수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죠. 프랑수아가 이렇게 늦게 태어난것은 그의 아버지인 앙리 2세가 아름다웠던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빠져 있어서 아내와 함께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국왕에게 엄청나게 영향력을 행사했었는데 그녀가 앙리 2세를 달래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해서 후계자를 얻어야한다고 설득했고, 이에 앙리 2세는 마지못해서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그녀는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프랑스 궁정에서 매우 굴욕적으로 살아야했었습니다.

남편의 정부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모든것을 뺏긴채 지냈었지만 남편이 죽은뒤에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사적으로 복수를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수아는 할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죽고 아버지인 앙리 2세가 즉위하면서 국왕의 장남이자 왕위계승자에게주어지는 칭호였던 "도팽"이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그리고 앙리 2세는 이 아들에게 엄청난 신붓감을 찾아주게 되죠. 바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였습니다.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중요시했었는데 메리 스튜어트가 여왕이 된 시기는 잉글랜드와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문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여왕 메리를 프랑스의 도팽과 약혼시키기로 했고, 안전을 위해서 프랑스로 보냈었죠.



앙리 2세 프랑수아의 아버지


메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고 프랑수아는 자신의 약혼녀와 매우 잘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558년 14살의 도팽은 자신보다 두살 많은 약혼녀와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이제 프랑수아는 프랑스의 도팽이면서 스코틀랜드 여왕의 남편이 된것이었습니다. 역시 1558년 블러디 메리(잉글랜드의 메리 1세)가 사망하고 그녀의 동생인 엘리자베스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앙리 2세는 엘리자베스가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헨리8세의 누나의 손녀인 자신의 며느리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메리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문장을 넣게 하기도 했죠. 이런 상황은 멀리 있는 프랑스에서는 그저 주장일 뿐이었지만 잉글랜드와 바로 붙어있던 스코틀랜드에는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에서는 앙리 2세가 명확히 왕위를 주장하던가 아니면 그냥 아무소리 말던가 했어야한다고 하더라구요. 이런식으로 아님 말고..라고 한 것은 프랑스에는 지장없지만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에서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하면서 말이죠.)



프랑스에서의 메리 스튜어트의 문장

저기 잉글랜드 문장도 넣어서 메리의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장했습니다.



결혼한지 1년이 조금 더 지난후인 1559년 7월 15살의 프랑수아는 갑작스럽게 국왕이 됩니다. 그의 아버지인 앙리 2세는 마상시합에서 눈을 찔리는 부상을 당했고 결국 사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프랑수아가 국왕이 되면서 이제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프랑수아 2세와 메리 스튜어트


국왕이 된 프랑수아는 사실 섭정이 필요없었습니다만 그는 나이가 어렸고 몸이 약했기에 통치 초기 메리 스튜어트의 외가인 기즈 공작 가문의 사람들에게 통치를 일임하게 됩니다. 프랑수아의 모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 역시 막 남편을 잃은 상중이었기에 나설수 없었기에 이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메리 스튜어트에게는 프랑스 궁정에서 더욱더 지위를 확고히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녀 스스로 왕비였을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삼촌들이 국왕을 대리하는 막강한 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기즈 공작 프랑수아

메리 스튜어트의 외삼촌


하지만 기즈 가문이 권력을 잡았던 시기에 매우 인기가 없었으며 이것은 메리 스튜어트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도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비록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지만 실질적 통치는 섭정들과 어머니 마리 드 기즈가 담당하고 있었고 앙리 2세의 섵부른 왕위계승 주장은 잉글랜드를 자극했었으며 개신교도들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1560년 6월 마리 드 기즈가 사망하면서 더욱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은 프랑수아 2세의 건강이었습니다. 그는 건강이 매우 나빴으며 즉위한지 2년도 되지 않은 1560년 사망합니다. 그가 죽은뒤 왕위는 동생인 샤를 9세에게 돌아갔으며, 그의 아내였던 메리 스튜어트는 이제 자신의 왕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상복을 입은 메리 스튜어트

프랑스 왕비의 상복은 저렇게 흰옷을 입는것이라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