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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187) 루이즈 드 케루알: 찰스 2세의 정부(두번째)

엘아라 2018. 7.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정부들과 그 후손들...(187) 루이즈 드 케루알: 찰스 2세의 정부(두번째)



루이즈 드 케루알

포츠머스 공작부인(여공작)

Louise Renée de Penancoët de Kérouaille, 

Duchess of Portsmouth 

(September 1649 – 14 November 1734)



찰스 2세가 죽을때가지 함께 했던 여인이 되는 루이즈는 1672년 찰스2세의 아들인 찰스(찰스 레녹스, 리치몬드 공작)을 낳습니다. 그후에 루이즈는 국왕으로부터 1763년 포츠머스 여공작,페어햄 여백작,피터스필 여남작 지위를 받습니다. 이것은 루이즈에게 지위와 영지를 하사하는 것으로 그녀가 국왕의 공식정부라는 것을 확고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에게 엄청난 재산을 부여하는 것이었죠. 그녀는 이런 지위와 국왕이 하사한 연금따위로 엄청난 재산을 얻었으며 게다가 영국과의 외교관게를 위해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프랑스 궁정이나 대사들이 보내는 선물등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찰스 2세는 프랑스 궁정에 요청해서 그녀에게 프랑스 내 귀족지위를 얻도록했고 루이즈는 '오비니 여공작' 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루이즈의 아들인 찰스는 1675년 아버지에 의해서 리치몬드 공작과 레녹스 공작 지위를 얻었습니다. 



루이즈의 아들

찰스 레녹스

리치몬드 공작, 레녹스 공작, 오비니 공작


재미난것은 루이즈는 찰스 2세에게 "경도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했고 그 결과 찰스 2세가 그리니치 천문대를 설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후에 경도법이 제정되었고, 결국 경도의 중심이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가 되는 계기가 되는듯합니다. -0-;;; 경도가 중요한것은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위도와 경도를 알아야 배의 정확한 위치를 알수 있는데 문제는 경도는 중심이 되는 위치가 있어야하거든요. 결국 지구가 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구면삼각법으로 게산해야하는 문제라..복잡합니다. -0-;;;)


루이즈는 찰스 2세에게 매우 애정을 많이 받았던 여성으로 찰스 2세는 죽을때까지 관게를 지속합니다. 물론 위험이 있었는데 가장 큰 위협은 1678년의 "Popish Plot"였습니다. 이 음모는 잉글랜드 내의 가톨릭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것으로 가톨릭 교도는 모두가 위협에처했었는데 심지어 캐서린 왕비조차도 의심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루이즈도 위험했지만, 캐서린 왕비의 도움으로 화를 면할수 있어습니다. 아마도 캐서린은 남편이 루이즈에게 진정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녀를 도왔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게다가 같은 가톨릭 교도였기에 더 호의적이 되었을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루이즈가 왕비에게 늘 한수 접고 들어간것도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루이즈가 아프거나 프랑스를 방문하는 등으로 국왕 곁을 떠나있었어도, 찰스 2세는 루이즈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었고 이것은 그가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증거일 것입니다. 또 찰스 2세는 1682년 건조된 왕실 요트에 HMY Fubbs 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Fubbs는 찰스 2세가 루이즈를 부르던 애칭이었다고 합니다.


찰스 2세


1685년 찰스 2세가 죽어갈때 그의 곁에서 그가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력히 지지했던 인물중 한명이 바로 루이즈였습니다.그리고 찰스 2세는 마지막까지 자신곁에 있던 세여성들인 넬귄, 루이즈 드 케루알 그리고 아내인 캐서린 왕비에 대해서 걱정을 했으며 동생이자 후계자인 제임스 2세에게 이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찰스 2세가 사망한후 루이즈는 프랑스인이자 가톨릭이었기에 잉글랜드에 머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는 가끔 방문하는데 아마도 아들인 리치몬드 공작이 있었기때문일듯합니다. 특히 그녀는 조지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여기에는 제임스 2세의 정부였던 도체스터 여백작 캐서린 세들리와 윌리엄 3세의 정부였던 오크니 백작부인 엘리자베스 해밀튼을 만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이즈는 찰스 2세가 부여한 연금과 영지를 모두 잃었고 이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루이즈는 프랑스에 있는 영지인 오비니로 가서 살았으며 빚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후에 루이 15세가 섭정인 오를레앙 공작이 사망한후에 그녀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그녀를 빚쟁이들로부터 보호해줬었다고 합니다. 루이즈는 1734년 85살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루이즈 드 케루알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