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인판타들...(46) 인판타 카타리나 : 주앙 4세의 딸 (첫번째)

엘아라 2018. 6. 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찰스 2세 정부들 하고 있는데 왕비도 하는군요 =-=


포르투갈의 인판타들...(46) 인판타 카타리나 : 주앙 4세의 딸 (첫번째)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카타리나 디 브라간사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Catherine of Braganza 

(25 November 1638 – 31 December 1705)



인판타 카타리나는 1638년 당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과 그의 아내인 루이사 데 구스만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카타리나 역시 포르투갈의 공주가 되죠.

카타리나의 어머니인 루이사 데 구스만은 에스파냐 출신이었지만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로부터 분리되어서 독립하는것을 열렬히 지지했었으며, 남편인 주앙 4세의 강력한 지지자였다고 합니다. 루이사 데 구스만은 정치적으로 야심이 많은 여성이었으며 이것은 인판타 카타리나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주앙 4세



인판타 카타리나는 어린시절 왕실 궁전 근처의 수녀원에서 교육받게 됩니다. 당시 수녀원은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라 여성들의 교육등을 담당하던 곳이었으며 이때문에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어린시절 수녀원에서 자주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히 궁정의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 도덕적 종교적 교육을 받을수 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인판타 카타리나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느슨했지만 어쨌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전쟁중이었으며 이런 상황은 아마 인판타 카타리나가 수녀원에 들어가서 교육받는 계기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판타 카타리나가 가족 생활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루이사 데 구스만은 아이들에게도 헌신적인 어머니였다고 알려져있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호하는데 열성적이었기에 인판타 카타리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어머니의 강력한 보호아래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었습니다.



루이사 데 구스만

포르투갈의 왕비


인판타 카타리나는 아버지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면서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여성이 됩니다.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은 에스파냐와 적대적이었던 나라들과의 외교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계기가 됩니다. 게다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전쟁중이긴 했지만 에스파냐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기에 포르투갈과 평화를 맺고 싶어하기도 했었죠. 게다가 포르투갈은 본토보다 아프리카,인도,신대륙등에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였기에 인판타 카타리나의 존재는 외교적으로 더욱더 중요하게 되었으며 그녀는 어릴때부터 여러 남자들과의 혼담이 오가게 됩니다.


인판타 카타리나와 혼담이 오간 남자들에는 후안 데 아스투리아,프랑수아 드 방돔을 비롯해서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 혼담들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후안 데 아스투리아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4세의 사생아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 유명했으며 또한 발타자르 카를로스가 죽은뒤 오래도록 건강한 아들을 얻지 못했던 펠리페 4세의 건강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와 인판타 카타리나가 결혼하면 에스파냐와포르투갈의 전쟁을 끝낼수 있었기에 진행 된듯합니다만, 이 상황은 후안의 애매한 지위와 에스파냐 왕위계승과 연결될수 있는 .문제였기에 성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안 데 아스투리아

애스파냐의 펠리페 4세의 사생아 아들



보퍼트 공작 프랑수아 드 방돔은 앙리 4세와 그의 가장 유명한 정부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의 아들이었던 세자르 드 방돔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는데 루이 13세가 사망한뒤 섭정모후인 안 왕비와 그녀의 총신이었던 마자랭을 대신해서 정부를 꾸려가고 싶어했었으며 마자랭에 대한 음모를 꾸몄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에스파냐와 적대적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원했던 포르투갈이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혼담을 진행했을 것입니다만 역시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수아 드 방돔

보퍼트 공작, 앙리 4세의 손자


그리고 루이 14세와의 혼담은 사실상 마자랭의 음모중 하나였습니다. 마자랭과 섭정 모후였던 안 왕비는 에스파냐와의 평화를 위해서 펠리페 4세의 딸을 루이 14세의 아내로 얻으려했습니다. 하지만 외교적 문제에 부딪히게 되자 마자랭은 외교협상을 발휘해서 에스파냐와 결쟁관계에 있던 포르투갈의 공주와의 혼담을 진행시켰고 이것은 결국 에스파냐쪽에서 프랑스와의 혼담에 더 목매게 만들었습니다. 그랬기에 당연히 루이 14세와의 혼담은 성사될수 없었습니다.



루이 14세


비록 몇번의 혼담이 성사되지 않았지만 인판타 카타리나는 여전히 중요한 정략결혼 상대였으며 특히 언니인 베이라 여공 후아나가 죽은뒤 살아남은 주앙 4세의 첫번째 자녀였기에 역시나 정치적으로 더 중요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결국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