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0-;;;;
역시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군요 ㅠ.ㅠ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5) 1580년 포르투갈 왕위계승문제 (첫번째)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의 남성 왕위계승자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이 1578년 알카세르-퀴비르Alcácer Quibir전투에서 24살의 나이로 미혼으로 전사했을때 그 외에 남은 남성 후계자는 그의 종조부이자 추기경이었던 엔리크밖에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엔리크는 국왕이 되었지만 이미 66살의 나이였고 성직자로 평생을 지냈기에 그에게는 후손이 없었습니다. 엔리케는 국왕이 되면서 후계자를 얻기위해 신부를 구하려 했지만 그는 서원을 한 성직자였기에 교황의 허가없이 결혼할수 없었는데 당시 교황은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의 눈치를 보느라 그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그가 죽으면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자 문제가 발생할 예정이었습니다.
포트투갈의 엔리크
결국 엔리크가 적자를 얻을수 없었기에 포르투갈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들처럼 "여성의 계승권리"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아비스 가문의 여성후손들이 왕위계승을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런 계승권을 가진 사람들중에 왕위를 이어받을 만한 사람들을 찾고 있었으며, 다섯명정도의 후보가 있었습니다.
마누엘 1세이후의 포르투갈 왕가의 가계도
candidate라고 적힌 사람들이 모두 1580년 왕위계승 후보자들이었습니다.
(클릭하면 가계도가 커집니다.)
먼저 여성계승권을 포함하는 포르투갈의 상속법에 따르면 당시 계승 순서는 당시 파르마 공작의 후게자였던 라누치오 파르나세-브라간사 공작부인인 인판타 카타리나(기마랑이스의 카타리나)-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오스트리아의 황후인 마리아 (카를 5세의 딸) - 사보이 공작이었던 엠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순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내부 문제는 물론 외교적 문제등을 따지만 이들의 순서대로 왕위계승권리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들중 브라간사 공작부인인 카타리나는 자신과 자신의 남편의 권리를 통해서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할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브라간사 공작 가문은 비록 주앙 1세의 사생아 아들이었던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가 첫 공작이었지만 이후 공작가문은 포르투갈 왕가의 여성들과 결혼했기에 여성계승권을 고려할때 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카타리나는 자신과 그녀의 후손들은 포르투갈인임을 강조했었습니다.
기마랑이스의 카타리나
브라간사 공작부인
그녀의 손자는 결국 포르투갈의 국왕이 됩니다.
상속법에 따른 계승순위 1위였던 라누치오 파르나세는 당시 겨우 11살이었기에 국왕으로 즉위하기 애매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가까웠고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자 가장 강력한 왕위계승후보자중 한명이었던 펠리페 2세를 지지했었기에 그가 계승을 하기는 힘들어보였습니다.
라누치오 파르나세
후에 파르마 공작
그의 할머니는 펠리페 2세의 이복누나이기도 했습니다.
후보자들중 가장 강력한 사람은 사실상 에스파냐의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강력한 에스파냐의 국왕이었으며 포르투갈의 왕위를 얻는다면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치하는 국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펠리페의 여동생인 마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였고 당연히 마리아는 자신의 계승권리를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펠리페의 아들로 그의 후계자인 펠리페는 마리아의 외손자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국인이었으며 포르투갈 귀족들은 그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죠.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사보이 공작 엠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경우는 좀더 복잡했는데 사보이 공작령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는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긴 했었지만 펠리페 2세의 권리보다 자신의 권리가 후순위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는 펠리페 2세를 지지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사보이 공작 임마누엘레 필리베르토
펠리페 2세와는 사촌관계입니다.
하지만 강력하게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인물중 한명은 사실 왕위계승권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주앙 3세의 아들인 베자 공작 인탄테 루이스의 아들인 안토니우였습니다. 그는 비록 국왕의 손자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식부인이 아니었고 그는 사생아였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아마도 부유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성요한기사단(구호기사단)의 단장지위를 얻었던듯합니다. 그는 세바스티앙이 죽은뒤 바로 자신이 국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안토니우
카르토의 피리오르 (성 요한 기사단 단장에게 부여되는 지위라고 합니다.)
1580년 1월 포르투갈의 엔리크가 죽었고, 이제 포르투갈 의회는 여러 후보자들중에서 포르투갈의 국왕을 선출해야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역사이야기 > 포르투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7) 포르투갈 독립 전쟁 (0) | 2018.05.22 |
---|---|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6) 1580년 포르투갈 왕위계승문제 (두번째) (0) | 2018.05.15 |
포르투갈의 인판타들...(44) 기마랑이스의 카타리나 : 마누엘 1세의 손녀 (0) | 2018.05.01 |
포르투갈의 인판타들...(43) 기마랑이스의 마리아 : 마누엘 1세의 손녀 (0) | 2018.04.24 |
포르투갈의 인판타들...(42)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 : 주앙 3세의 딸 (0) | 2018.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