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인판타들...(28) 포르투갈의 후아나 : 두아르트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7. 12. 1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새해 특집의 압박감이 몰려옵니다. 빨리 글들을 써놓고 새해특집을 쓸 글을 읽어야하는데...

바이에른의 이자보에 대한 글을 하나 찾아놨는데 그게 하필 죽어버린 데스크탑에 넣어놔서...ㅠ.ㅠ

거기 하드가 두개인데 하나는 살았는데 하나가 죽어버려서...

문제가 죽은 하드가 백업용하드라...ㅠ.ㅠ 제 사진들 어쩔껀지..ㅠ.ㅠ

하여튼 자료들을 다시 찾거나 아니면 미헨 대공비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에든버러 공작부인)을 해야할 판입니다 -0-;;(그건 지난번에 올가 왕비 때문에 산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거든요 )


그나저나 정신차려보니까 두아르트를 에두아르트라고 읽었더라구요 -0-;;; 

나중에 시간나면 적당히 고쳐보도록 하겠습니다 -0-;;;


포르투갈의 인판타들...(28) 포르투갈의 후아나 : 두아르트의 딸(두번째)





포르투갈의 후아나

카스티야의 왕비

Joana of Portugal 

( 20 March 1439 – 12 December 1475)


엔리케 4세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나바라의 블랑카 사이의 이혼 사유에 대해서 귀족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기에 후아나가 아이를 낳게 되자 많은 귀족들이 그 아이가 국왕의 딸이 아니라고 의심하게 됩니다.궁정에서는 후아나가 낳은 아이가 국왕의 딸이 아니라 국왕의 총신인 벨트란 드 라 쿠에바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습니다. 이때문에 후아나의 딸을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벨트란의 딸 후아나"정도의 의미였습니다.


엔리케 4세는 새로태어난 딸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하고 왕위계승자로 선포하려했지만, 귀족들은 후아나의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중에 가장 핵심 인물은 엔리케 4세의 친구이자 신임했던 신하였던 후안 파체코가 있었습니다.아마도 후안 파체코는 국왕의 신임이 자신에게서 벨트란 드 라 쿠에바에게 옮겨갔으며, 벨트란 드 라 쿠에바가 전통적 권력자 가문이었던 멘도사 가문과 연결되었기에 정치적으로 그를 경계했었을 것이며, "벨트란의 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후아나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후아나의 딸

카스티야의 후아나

후아나 라 벨트라녜하


결국 귀족들은 엔리케 4세에게 딸인 후아나가 아니라 이복동생인 알폰소를 왕위계승자로 추대했고 이를 거부하는 국왕 엔리케 4세와 전쟁을 합니다. 결국 이 내전은 알폰소와 그를 지지하는 쪽의 승리로 끝났으며, 엔리케 4세는 딸이 아니라 동생인 알폰소를 왕위계승자로 인정해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딸인 후아나를 동생인 알폰소와 결혼시키기로 하므로써 딸에게 여전히 카스티야 왕위계승권리를 부여하려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후아나 왕비는 부정한 여성이자 국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여성으로 이식이 되었고 정치적 이유로 궁정에 있지 못하고 다른 외딴 곳으로 가야했습니다. 엔리케 4세는 아내를 자신의 지지자중 한명이었던 폰세카 주교에게 보냈었습니다. 문제는 이곳에서 후아나가 큰 사고를 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과 남편과 떨어져 귀양간 것과 다름없던 후아나는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곳에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폰세카 주교의 조카였던 페드로 데 카스티야 이 폰세카였죠. 후아나는 페드로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상황은 딸인 후아나 라 벨트라녜하에게 도움이 안되는 일이었는데, 국왕인 엔리케 4세는 성적 불구라고 모두에게 알려졌던 상황이었으며, 후아나는 잠시 궁정을 떠나있는 동안에도 다른 남자와 연애관계가 되어 아이를 낳았기에 모두들 후아나 라 벨트라녜하가 국왕의 딸이 아니라고 확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엔리케 4세의 동생인 알폰소가 갑자기 죽었을때 엔리케 4세가 딸인 후아나를 왕위계승자로 내세우지 못하고 여동생인 이사벨을 왕위계승자로 인정해야했던 이유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

"가톨릭 공동군주"


사생아를 낳은 뒤 후아나는 국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엔리케 4세는 딸의 지위때문에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는 돌리지 않았었던 듯합니다. 이후 후아나는 멘도사 가문의 보호아래 있었는데 후에 세비야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1474년 엔리케 4세가 죽은뒤 몇몇 고위 귀족들은 당시 왕위계승자였던 이사벨이 아닌 후아나를 지지했으며 이를 위해 수도원에 있던 후아나 왕비에게 가게 됩니다. 그리고 후아나 왕비는 딸의 왕위계승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딸은 오빠인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는데 관여하게 됩니다. 1475년 5월 아폰수 5세와 카스티야의 후아나는 결혼했고 아폰수 5세는 아내의 권리를 들어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하게 되죠. 하지만 후아나 왕비는 1475년 12월 마드리드에서 사망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