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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왕비들...(106) 앤 불린 : 헨리 8세의 왕비 (다섯번째)
앤 불린
Anne Boleyn
(c. 1501 – 19 May 1536)
1532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워햄이 사망하면서 캔터베리 대주교직이 공석이 됩니다. 이것은 헨리와 앤이 결혼할만한 기회로 여겨지게 됩니다. 1532년 11월 앤과 헨리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곧 앤은 임신하게 되었으며 둘은 결혼을 공식화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에 대한 심판도 나기 전이었던 1533년 1월 헨리와 앤은 법적으로 정식으로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종교의식이 남아있었는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토마스 크랜머는 불린가문에 호의적이었을뿐만 아니라 후에 토마스 크롬웰과 더불어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끄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 무효를 인정해주었으며, 이제 앤은 공식적으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될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크랜머
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앤이 이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는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만, 앤은 더 확고한 지위를 원했습니다. 캐서린왕비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판결에 불복했으며 여전히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비이며 헨리 8세의 정식 아내라고 주장합니다. 또 캐서린의 조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으며 비록 투르크와의 전쟁때문에 당장 이모와의 관계에 전념할수 없었지만, 그는 적어도 이모인 캐서린에게 헨리 8세가 직접적 위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장치였기도 합니다. 훗날 헨리 8세가 앤을 처형한 것을 보면, 캐서린이 아라곤과 카스티야 군주들의 딸이자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이모였다는 사실 때문에 헨리가 캐서린을 유폐시키고 돈을 지급하지 않는 정도로의 일밖에 하지 못했다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캐서린 왕비
하지만 앤은 임신중이었으며 헨리 8세는 앤이 아들을 낳아줄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앤을 위한 성대한 대관식을 준비합니다. 그는 앤을 군주들만이 앉았던 성 에드워드의 의자에 앉게 함으로써 그녀의 권위를 더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태어날 앤의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로 군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죠. 아마도 앤의 삶에서 정점은 바로 1533년 6월의 대관식이었을 것입니다.
대관식후 앤은 이제 아이만을 낳길 기다립니다. 헨리는 아들이 태어날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아마 틀림없이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533년 9월에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아마도 뱃속에서 이미 군주의 의자에 앉았던 것이 징조였었던 것인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중 한명으로 손꼽히게 될 엘리자베스 1세였죠.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태어났을때 그녀는 단지 아버지의 실망스러운 딸일 뿐이었습니다.
앤의 딸인 엘리자베스
13살때
비록 딸이 태어나서 실망스러웠지만, 건강한 딸이 태어났다는 것은 다음에는 건강한 아들이 태어날수 있다는 가능성이었기에 헨리는 다시한번 기대를 하게 됩니다. 헨리는 캐서린과의 딸인 메리를 "사생아"로 명시했으며 앤의딸인 엘리자베스만을 유일한 적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메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반항했으며 어머니처럼 절대 자신의 지위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앤은 이런 메리를 보면서 캐서린 왕비를 떠올렸을 것이며 자신에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앤은 메리의 기를 죽이기 위해 메리를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만들었으며 공주로써 받았던 모든 것을 뺏아버리게 됩니다. 이런 가혹한 행위는 훗날 메리가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끔찍히 싫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를 지지했던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와 헨리 8세는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상황은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내려서 이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은 국왕이라고 선포하게 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앤 역시 이런 수장령을 지지햇는데 그녀가 잉글랜드 교회나 사회의 개혁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였기 보다는 잉글랜드 왕비로써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앤과 헨리의 사이는 점차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첫아이가 딸이어서 실망했던 헨리는 앤이 곧 임신하면서 그 실망감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앤의 배가 불러왔지만 임신은 공표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아이를 유산했었던듯합니다. 헨리 8세는 아이가 유산 된것에 대해서 아마도 사람들이 부모의 죄때문이라고 쑥덕대는 것을 원치 않았었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지 않았던듯합니다. 그리고 원하던 아들을 얻지 못하게 되자 조급해지게 되죠.
헨리 8세
결혼전 자신을 거절하고 날카롭게 비판을 했으며,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앤에게 매력을 느꼈었던 헨리는 이제 아내가 된 앤이 여전히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것에 화를 내게 됩니다. 앤은 그동안 자신을 받아주던 헨리가 이제 순종적 아내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되죠. 하지만 앤은 곧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여야했습니다. 헨리는 다시한번 다른 여성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앤은 남편의 바람기를 인정해야했으며 자신에게 호의적인 여성이 남편의 정부가 되는 것을 바래야했습니다.
메리 쉘튼
앤의 사촌으로 헨리8세의 정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1535년 앤은 다시 한번 임신하므로써 헨리에게 다시 한번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만 아들이었던 아이는 사산됩니다. 이때 앤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었으며 그녀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종교개혁에 선두에 섰으며 자신을 비난하고 국왕의 수장령을 거부한 모든 이들을 자신의 적으로 봤었죠. 이때문에 이들이 잔혹하게 사형당하면서 사람들은 이에 대해 앤을 더욱더 비난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사산된것을 쉬쉬하게 되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앤이 벌을 받아서 아이를 잃었다고 여길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은 앤을 점차적으로 궁지에 몰아가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헨리 8세와 여인들(앨리슨 위어, 박미영, 루비박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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