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90)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첫번째)

엘아라 2016. 10.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제가 튜더 왕가 책들을 좀 읽긴했는데 그게 헨리 8세 이후이야기를 주로 읽었드랩니다.

하여튼 그 결과 의외로 튜더 왕가의 왕비임에도 요크의 엘리자베스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는...-0-;;;;;;;


고작 아는것이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며느리로 맞으려했던 강력한 이유가 그녀가 가진 왕위계승권때문이었다는 정도랄까요-0-;;;

뭐 제가 읽은 책들에서는 레이디 마거릿에 기가 눌려서 살았던 왕비정도로 이야기하던데 최근의 글들을 보면 요크의 엘리자베스도 나름 왕비로써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살았고 남편인 헨리 7세와도 사이가 좋았다고 하고 뭐 그러더라구요-0-;;;


어쨌든 이제부터 자료를 좀 읽어야겠습니다.-0-;;;


잉글랜드의 왕비들...(90)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첫번째)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

Elizabeth of York 

(11 February 1466 – 11 February 1503) 

엘리자베스의 문장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1466년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4세와 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4세는 요크 공작의 아들로, 랭카스터 가문의 국왕인 헨리 6세를 물리치고 국왕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장미전쟁당시 요크 가문의 계승권리에 대한 주장은 좀 복잡했는데 에드워드 4세의 할머니인 앤 머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셋째아들이었던 클라렌스 공작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었습니다. 클라렌스 공작에게는 딸인 필리파밖에 없었으며 이 필리파의 손녀가 에드워드 4세의 할머니였습니다. 

이때문에 에드워드 4세의 아버지였던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 후손은 에드워드 3세의 넷째아들인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인 헨리 6세보다 우선의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할머니인 시슬리 네빌은 랭카스터 공작의 외손녀이기도 했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


엘리자베스의 친가가 잉글랜드 왕가와 혈연적으로 매우 강하게 엮여있던 반면, 엘리자베스의 외가는 잉글랜드의 왕가와 혈연적으로 거의 엮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기사였던 리처드 우드빌과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의 딸이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플랑드르쪽의 통치가문 출신으로 원래는 헨리 6세의 숙부였던 베드퍼드 공작의 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죽은뒤, 잉글랜드로 오던중 그녀를 마중왔던 기사였던 리처드 우드빌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우드빌 가문은 자퀘타가 헨리 6세의 숙모였다는 점과, 헨리 6세의 왕비였던 앙주의 마거릿이 자퀘타와 인척관계였던 관계로 랭카스터 가문측의 사람들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시 랭카스터 가문의 가신이었던 존 그레이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브리튼섬 최고의 미녀라고 일컬어졌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결국 요크가문의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았으며 그와 정식으로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미난 것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헨리 7세의 경우 엘리자베스와는 반대로,외가쪽으로는 잉글랜드 왕가와 혈연적으로 강하게 엮여있었지만, 친가쪽으로는 혈연적으로 엮이지 않았습니다. 헨리 7세의 할아버지는 웨일즈 출신의 기사였고, 헨리 7세의 할머니는 헨리 5세의 왕비이자 헨리 6세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발루아였습니다. 카트린 드 발루아는 남편이 죽은뒤 기사였던 오웬 튜더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그와 비밀리에 결혼한뒤 아이들을 낳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당대 매우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왕위가 여전히 불안한 상황에서 에드워드 4세가 왕위계승을 가지고 있는 왕가와 혈연적 관계가 있는 여성도 아니고, 외국과의 동맹을 강화시켜줄수 있는 여성도 아닌, 도리어 적의 편에 섰던 가문 출신의 여성이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해버린것은 정치적으로 큰 문제였으며, 요크 가문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결혼에 불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결혼한 이상, 둘의 아이들은 국왕의 적자로 왕위계승권을 가진 아이들이었기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첫번째 아이가 바로 요크의 엘리자베스였습니다.


엘리자베스가 태어났을때 아마도 에드워드 4세는 어느정도 실망을 햇을것입니다. 왜냐면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을 원했을 것이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첫번째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곧 다른 아이가 태어날것이라는 것을 의미했기에 아마도 엘리자베스의 탄생은 그리 실망스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탄생은 일시적으로 요크 가문 사람들을 뭉치게 만들었던듯합니다. 왜냐면 엘리자베스의 외할머니인 베드퍼드 공작부인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와 친할머니인 요크 공작부인 시슬리 네빌 그리고 에드워드 4세 시절 최고의 권신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결혼으로 국왕과 마찰을 빚고 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엘리자베스의 대부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 대부모의 역할은 이후 시대보다 더 컸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아이의 대부모가 되는 것은 아이에 대한 어느정도 책임감을 갖는것으로 워릭 백작이 대부모가 된것은 아무래도 좀더 정치적 의미를 생각할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