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가끔 생각하지만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어려서 힘든 상황을 겪어서 그런지 뭐랄까 궁정에서 잘 처신했다는 느낌이 든다죠.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나쁜 이미지로 남는 반면,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안 그런듯해요.
잉글랜드의 왕비들...(91)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두번째)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
Elizabeth of York
(11 February 1466 – 11 February 1503)
후대의 상상화
국왕의 첫째딸로 엘리자베스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녀는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중요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여성이었으며, 그때까지도 여전히 랭카스터 가문과의 문제가 남아있었던 에드워드 4세에게 딸의 혼담은 중요한 동맹을 얻을 기회였을 것입니다.
첫번째 혼담은 네빌가문 사람과의 혼담으로 1469년 조지 네빌과 약혼을 하게 됩니다. 조지 네빌은 워릭 백작이었던 리처드 네빌의 조카로 그의 아버지인 존 네빌은 몬태규 후작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에드워드 4세가 워릭백작과 벌어진 사이를 좀더 좁히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워릭 백작은 결국 에드워드 4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 약혼은 깨지게 됩니다.
네빌 가문의 문장
두번재 혼담은 프랑스와의 혼담으로 1475년 루이 11세는 아들인 샤를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482년 이 혼담은 깨지게 되는데 아마도 루이 11세는 이 결혼 말고 다른 혼담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마리 드 부르고뉴와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와 아들인 샤를을 결혼시키므로써 부르고뉴 공작령의 일부를 얻으려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루이 11세의 아들인 샤를 8세는 마르가레테와의 약혼도 깨고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속녀였던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죠.)
샤를 8세
비록 프랑스 왕위계승자와의 혼담이 깨어졌지만, 잉글랜드 국왕의 장녀였던 엘리자베스에게 다른 혼담이 충분히 들어올수 있었습니다만 아버지 에드워드 4세의 죽음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혼담을 중단되게 만듭니다.에드워드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그녀의 숙부였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실권을 장악하고 섭정이 됩니다. 리처드는 정권을 잡은뒤 엘리자베스의 외삼촌과 이복오빠를 처형하므로써 에드워드 4세 시절에 권력을 장악했던 우드빌 가문을 몰아냅니다. 이에 왕비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위협을 느끼고 장남을 제외한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웨스트민스터의 성역권으로 도망을 갑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남은 아들인 요크 공작 리처드마저 뺏기게 됩니다.
이후 엘리자베스의 숙부였던 리처드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중혼"임을 들어서 둘의 결혼이 무효이며 둘의 아이들 역시 왕위계승권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스스로 국왕이 됩니다. 물론 이 와중에 런던탑에 있던 엘리자베스의 두 남동생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아이들과 함께 성역권으로 도망간 엘리자베스 우드빌
리처드의 즉위이후,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와 함께 여전히 성역권에서 지내게 됩니다. 리처드 3세의 치세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는데 비록 리처드 스스로가 형의 중혼을 굳게 믿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카의 왕위를 뺏은것처럼 보였으며 요크가문 내에서도 불만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리처드가 주변의 신하들에 대해서 점차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다시 신하들이 리처드에 대한 충성을 재고하는 상황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였습니다. 리처드 3세의 불안정한 상황은 레이디 마거릿이 자신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로 돌아올때라고 판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망명해있는 아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왕위를 차지할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여러 신하들과 접촉했으며, 특히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접촉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자신의 아들과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레이디 마거릿이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국왕의 사생아가 아니라 국왕의 딸로 왕위계승권을 가진 여성으로 봤으며, 이것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왕비로써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헨리 7세의 어머니
결국 이 제안에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반란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에 상륙하지 못했고, 반란을 계획했던 버킹엄 공작은 국왕에게 사로잡혔으며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사권박탈을 당한뒤 집에 연금당했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성역권을 나와서 가택연금을 받아들여야했습니다. 아마도 리처드는 이런 상황에서 형의 딸들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었던듯합니다. 그리고 그는 조카들을 궁정으로 부르게 되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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