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그리스 근현대사를 봐야하는걸 깜빡했습니다.
이게 앨리스 왕자비 전기 때문에 제가 20세기 중반까지의 그리스 정치사는 대충 좀 아는데 19세기 그리스 정치사는 잘 모르더랩니다.ㅠ.ㅠ 그리스 독립 문제 보다가 머리아파서 때려쳤었는데 말입니다. 겨우 오톤 국왕 이야기 정도만 알아서...흑...
[새해특집]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그리스의 올가 왕비(7)그리스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기본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 과학,문학 등에 대해 알고 있죠. 그리고 이것들은 로마시대를 거쳐 결국 서양 문명의 뿌리를 이루는 근간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는 15세기 오스만제국에 의해 비잔틴움 제국이 멸망당한뒤 오래도록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 인들이 제국 내에서 차별받는 상황을 만들었었죠. 차별의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종교적 이유였을 것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을 믿었지만 그리스는 기독교를 믿었었죠.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이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퍼져나가면서 그리스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제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뭉친 나라를 만들길 원하게 되죠. 결국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1820년대 그리스 독립전쟁은 사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독립전쟁 초기 전쟁이라기 보다는 소요사태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많은 그리스인들이 독립을 원하는 열망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독립 전쟁이 그리스 전역으로 번져나갔으며 결국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할수 있었죠.
1821년 터키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 깃발에 축복을 내려주는 대주교
하지만 그리스의 독립은 온전히 그리스인들에 의한것이 아니었기에 독립이후의 복잡한 정치상황을 초래하는 계기가 됩니다. 영국,프랑스,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처음에는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미묘한 국제 관계때문이었는데, 이를테면 같은 정교회를 믿었으며 국경이 맞닿아있던 러시아는 그리스에 도움이 될만한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는 오랜 꿈이 있었는데 바로 정교회를 믿는 나라들을 뭉쳐서 자신의 제국아래 두는 것이었죠. 이것을 가장 소원한 사람은 예카테리나 대제로 그녀는 둘째손자였던 콘스탄틴이 이 러시아외의 다른 정교회를 믿는 지역을 통치하길 바랬기에 이름조차도 로마의 위대한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정도라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러시아의 바램은 러시아가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을 원치 않은 다른 나라들(영국,독일등)이 이렇게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그리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당대 영국 최고의 시인이었던 바이런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하고 참여했으며 이런 상황은 사람들에게 그리스 상황을 환기 시키는 것이었죠. 특히 1822년 조지 캐닝이 영국의 외무장관이 되면서 영국은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다른 나라들 역시 이에 맞춰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하게 됩니다.
결국 내부적 전쟁과 유럽의 강대국의 압력을 통해서 그리스는 1830년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죠. 하지만 그리스 독립에 관여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그리스의 정치상황에 어느정도 개입합니다.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길 원했었죠. 재미난것은 정치적 문제때문에 그리스의 국왕은 그리스 독립에 관여한 유럽의 강대국들의 왕족들은 배제하기로 한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한 그리스의 첫 국왕으로 선출된 인물은 바로 바이에른의 오토 왕자였습니다. 그는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1세와 그의 부인인 작센-힐데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의 둘째아들이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오톤"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했었던 그의 통치는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외국인인 국왕과 국왕의 측근에 대해서 매우 불신했었고 이런 상황은 결국 오톤의 정책에 그리스인들이 불만을 품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오톤은 그리스 국민들에게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스 복장을 한 오톤 국왕
이 옷은 그리스에서 터키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입던 옷으로 그리스 독립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던듯합니다.
여전히 강대국들은 그리스가 왕국이길 원했으며 유럽의 왕족중 한명이 국왕이 되길 바랍니다. 오톤이 쫓겨난뒤 여러 후보들이 나오는데 그리스가 원하던 인물은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아들이었던 앨프러드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리스 독립에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 출신의 국왕을 내지 않기로 합의 되어었기에 앨프러드는 그리스 국왕이 될수 없었죠. 이때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자 앨버트 공의 형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엘른스트 2세 역시 국왕 후보가 되려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식이 없었기에 여왕과 앨버트공의 둘째아들인 앨프러드가 그의 지위를 잇기로 되어있었는데 그가 그리스의 국왕이 된다면 그의 지위는 앨프러드가 잇게 되는 상황이 되었으며 앞선 이유때문에 에른스트 2세 역시 후보가 될수 없었죠.
영국의 앨프러드 왕자, 에든버러 공작,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그는 올가의 사촌이었던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합니다.
어쨌든 그리스의 국왕으로 강력한 후보가 바로 덴마크의 빌헬름 왕자였습니다. 빌헬름의 아버지는 덴마크의 추정왕위계승자이긴 했지만, 그의 가문은 사실상 매우 한미한 가문이었죠. 하지만 빌헬름의 누나는 영국의 왕위계승자의 부인이었고 이런 상황은 그리스에서 매우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와 누나인 알렉산드라 여동생인 다우마와 함께 있는 빌헬름 왕자
결국 1863년 빌헬름은 그리스의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리스식으로 "게오르기오스"라는 이름을 왕명으로 선택했었습니다. 그때가 겨우 열일곱살이었습니다. 그리스 국왕으로써 빌헬름은 매우 신중하게 행동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였기에 그 역시 오톤 국왕처럼 덴마크나 독일쪽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신하로 데려왔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톤과 달리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그리스 신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은 전임자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었습니다. 그리고 복잡하고 절대 군주제에 익숙했었던 그리스에 "입헌군주"로써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었죠.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
게오르기오스는 그리스인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개신교도였지만 그리스 사람들의 종교인 정교회를 존중했으며 그리스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이콘에 키스하는등 정교회의 관습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었죠. 또 늘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사람들에 대해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했습니다. 이런 게오르기오스에게 역시 그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러시아의 여대공이며, 독실하게 정교회를 믿었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은 정말 괜찮은 신부감이었던 것이었죠.
물론 게오르기오스와 올가가 결혼한뒤 그리스 정치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며 왕가는 여전히 인기가 없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이에 대해 "그리스 사람들은 왕가가 절대 외국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었죠. 하지만 게오르기오스는 입헌군주로써 최선을 다했으며 그리스의 정치 상황도 게오르기오스 1세 시대가 그나마 가장 안정적 군주제를 추구했던 시절이라 할수 있을듯합니다.
그리스의 영토 변화
자료&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새해특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특집] 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 그리스의 올가 왕비(9) 그리스의 왕비 (0) | 2016.01.09 |
---|---|
[새해특집] 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 그리스의 올가 왕비(8) 그리스에서의 가족생활 (0) | 2016.01.08 |
[새해특집]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그리스의 올가 왕비(6)결혼 (0) | 2016.01.06 |
[새해특집]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그리스의 올가 왕비(5)어린시절 (0) | 2016.01.05 |
[새해특집]러시아를 그리워한 그리스 왕비 : 그리스의 올가 왕비(4)부모 (0) | 2016.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