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다시 루이 14세 정부로 돌아왔습니다.-0-;;;;
음냐 정부들 이야기는 절대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습니다.
참 주제를 잘 정한것같아요.
정부들과 그 후손들...(69)마드무아젤 드 퐁당주 마리 안겔리크 드 스코라이 : 루이 14세의 정부
마리 안겔리크 드 스코라이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
퐁탕주 공작부인(여공작)
Marie Angélique de Scorailles
(July 1661 – 28 June 1681)
후에 마드무아젤 드 퐁당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마리 안겔리크 드 스코라이는 1661년 상 오르베뉴 지방에 있는 샤토 드 코르피에르Château de Cropières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장-리갈 드 스코라이는 퐁당주의 영주였는데 이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영지였다고 합니다. 아마 이때문에 마리 안겔리크는 "마드무아젤 드 퐁당주"라는 이름으로 궁정에서 불렸던듯합니다. 마리 안겔리크의 가문은 오르베뉴 지방의 오래된 귀족가문이었는데 마리 안겔리크가 태어난 성은 13세기에 지어진 것이었죠.
어린시절부터 마리 안겔리크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이런 모습은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궁정에 보내서 이익을 얻기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마리 안겔리크를 국왕의 눈에 띄게 하려고 한것이었죠. 마리 안겔리크는 루이 14세의 아들인 그랑 도팽과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만, 사람들은 그런것에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1678년 17살의 마리 안겔리크는 궁정으로 갔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인 샤를로트의 시녀가 됩니다. 그리고 곧 루이 14세의 눈에 띄게 되죠.
루이 14세
당시 루이 14세는 두 여인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오랜 정부인 마담 드 몽테스팡과 마담 드 몽테스팡의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마담 드 멩트농이 둘이었죠. 둘은 서로 대비되는 여성들이었는데 마담 드 몽테스팡이 화려하고 루이 14세와의 관계에 적극적인 여성이었다면, 마담 드 멩트농은 수수하고 국왕과의 육체적 관계에는 보다 소극적인 여성이었죠. 대신 마담 드 멩트농은 국왕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것을 더 원했는데 마담 드 몽테스팡에게 지친 루이 14세에게는 마담 드 멩트농이 새로운 타입의 여성이었습니다.
어쨌든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루이 14세에게 미모로 눈에 띤 여성이 바로 마드무아젤 드 퐁당주였습니다. 그녀는 국왕이 고민하고 있었던 두여성들과는 또다른 여성으로 마담 드 몽테스팡이나 마담 드 멩트농이 매우 똑똑한 여성들이었던것에 비해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의 지적 능력은 미모와 반비례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두 여자들에게 시달린 루이 14세가 전혀 다른 타입의 여성에게 눈이 갔던 것이 아닐까합니다.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는 곧 루이 14세의 총애받는 정부가 됩니다. 루이 14세는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에게 매우 너그러웠으며 심지어 그는 자신이 마리 안겔리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고 싶어한듯한 복장까지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국왕이 수많은 보석들과 돈을 줬으며 심지어 자신에게 맞추는듯한 모습을 보여주자, 마리 안겔리크는 기고만장해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마치 왕비가 된양 행동을 합니다. 왕비앞에서 국왕의 선물을 마구 자랑했던 것이었죠. 이런 상황은 궁정 사람들이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에 대해서 그녀가 별 생각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계기였을듯합니다.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가 총애받게 되자 가장 화를 낸 인물이 바로 마담 드 몽테스팡이었습니다. 그녀는 국왕이 아무생각없는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와 연애질 하는것에 대해서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을듯합니다. 자신의 적은 단순한 마드 무아젤 드 퐁탕주가 아니라 마담 드 멩트농이라고 생각했을듯합니다. 하지만 어린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가 자신의 앞에서 국왕의 총애를 자랑하고 궁정에서 화제가 되는 것에 매우 짜증이 났었던듯합니다. 이를테면 "퐁탕주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머리스타일은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가 임시로 한 머리를 보고 궁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머리스타일을 따라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때문에 마담 드 몽테스팡이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에게 시비를 건적도 있습니다. 마담 드 몽테스팡은 루이 14세가 선물한 곰 두마리를 "실수로"풀어놨고 그 곰들은 궁전에 있는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의 방을 부숴버렸죠.
몽테스팡 후작부인
하지만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에 대한 총애는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루이 14세는 기본적으로 지적인 여성들을 더 선호했는데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는 그의 기준에서 볼때 많이 부족했었습니다. 1679년 이미 국왕은 점차 이 어린 여성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죠.
1680년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는 아들을 사산하고 산후 처치가 좋지 못해서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는 매우 아프게 되죠. 루이 14세는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에게 많은 돈과 "퐁탕주 여공작"지위를 부여합니다만, 많은 예에서 그렇듯이 이런 상황은 그가 이제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는 계속 아팠으며 결국 궁정에서 은퇴해서 수녀원으로 갔으며 더이상 궁정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1681년 퐁탕주 여공작은 수녀원에서 사망합니다. 만 20살이되지 않은 나이였죠.
퐁탕주 여공작
그녀가 죽은뒤 "독살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많은 여성들이 연루되었는데 그중에는 마담 드 몽테스팡도 끼어있었죠. 이런 상황은 퐁탕주 여공작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는 의심을 받기 충분했습니다. 마담 드 몽테스팡이 퐁탕주 여공작을 미워한것은 유명했으니까요.
루이 14세는 퐁탕주 여공작이 실제 독살당햇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으며 이때문에 부검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퐁탕주 여공작의 가족들은 부검을 원하죠. 이때 나온 결론은 사인은 확실한것은 모르지만 적어도 독살은 아니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퐁탕주 여공작의 죽음은 아이를 유산하면서 다량으로 피를 흘렸고 산후가 좋지 못해서였으리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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