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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66) 팡티에브르 공작가문 :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엘아라 2015. 9. 2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루이 14세가 자신의 아들들인 멘 공작과 툴루즈 백작의 후손들에게 계승권을 부여하려고 했었는데 정작 이 둘의 남성 직계는 단절되어버리네요.-0-;;;그것도 혁명전에 말입니다.


정부들과 그 후손들...(67) 팡티에브르 공작가문 :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랑발 공

Louis Alexandre de Bourbon 

(Louis Alexandre Joseph Stanislas)

 (6 September 1747 – 6 May 1768)




루이 알렉상드르 조제프 스타니슬라스 드 부르봉은 1747년 파리에 있는 가문의 집인 "호텔 툴루즈"에서 팡티에브르 공작 루이 장 마리 드 부르봉과 그의 아내인 마리 테레즈 펠리치테 데스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그의 아버지인 팡티에브르 공작은 루이 14세와 그의 정부였던 마담 드 몽테스팡의 손자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모데나 공작의 딸로, 팡티에브르 공작부인의 어머니는 오를레앙 가문 출신이자 마담 드 몽테스팡의 외손녀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팡티에브르 공작부인


팡티에브르 공작의 재산은 엄청났는데 루이 14세가 자신의 아들인 툴루즈 백작에게 왕실 가족의 재산을 몰아주었으며(사촌인 그랑 마드무아젤의 재산을 상당수 마담 드 몽테스팡이 낳은 아들들에게 물려주길 강요했었습니다.) 또한 후에 멘 공작의 후계자들의 남성 직계 후손들이 단절되면서 그 재산 역시 팡티에브르 공작 가문으로 오게 되었죠. 그리고 형이 어려서 죽으면서 팡티에브르 공작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을 인물이 바로 이 루이 알렉상드르가 되죠. 그는 팡티에브르 공작의 후계자로써 "랑발 공"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


랑발 공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었고, 팡티에브르 공작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뒤 재혼하지 않고 자선사업에 전념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일곱명이었던 랑발공의 형제 자매는 여동생인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년기를 넘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팡티에브르 공작은 아들을 위해 신부를 고르게 됩니다. 그가 선택한 여성은 이탈리아쪽 사람으로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였습니다. 마리아 테레사는 카리냐노 공의 딸로 카리냐노 가문은 사르데냐 왕가의 방계가문이기도 했었습니다. 팡티에브르 공작은 마리아 테레사를 며느리로 선택한 이유가 그녀가 매우 자비롭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랑발공은 매우 부유했고 지위도 높았기에 방종한 삶을 살고 있있는데 아름답고 자애로운 아내를 맞이해서 아들역시 영향을 받길 바랬다고합니다.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

랑발 공비


랑발공은 1767년 1월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합니다. 재미난것은 결혼전 랑발공은 신부의 얼굴을 궁금해했고 자신을 시종으로 속여서 마리아 테레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결혼식이후 마리아 테레사는 남편이 이전에 시종이라고 이야기했던 인물이라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결혼직후에는 아내에게 착실할것처럼 보였던 랑발공은 곧 방종한 삶으로 돌아갔으며 심지어 빚을 갚기 위해 아내의 보석을 몰래 팔아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랑발공은 결혼 한 다음해인 1768년 아내곁에서 병으로 사망합니다. 아마도 그의 방종한 삶때문에 걸린 병이었을듯합니다. 다정했던 랑발 공비는 죽어가는 남편곁에 있었고 랑발공은 아내의 품안에서 죽었죠. 열아홉에 과부가 된 랑발공비는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유한 여성이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는데 그녀는 곧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랑발공의 죽음


팡티에브르 공작에게는 이제 자식으로는 딸인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만이 남았으며 그녀는 엄청난 상속녀가 됩니다. 이 상황은 그녀가  최고의 신부감이 되게 했으며 오를레앙 공작가문으로 시집가게 만들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