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글이 안써져요..흑..
정부들과 그 후손들...(68)팡티에브르 공작가문 :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마드무아젤 드 팡티에브르"(두번째)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팡티에브르
오를레앙 공작부인
Louise Marie Adélaïde de Bourbon-Penthièvre,
Duchess of Orléans
(13 March 1753 – 23 June 1821)
엘리자베트 비제-르블룅의 작품
혁명이 일어난 뒤인 1791년 4월 마리 아델라이드는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이것은 아마도 마리 아델라이드가 혁명에 동조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결국 불행한 결혼생활을 더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했던듯합니다. 마리 아델라이드의 남편인 오를레앙공작은 혁명 정부에서 "필리프 에갈리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죠.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노르망디에서 머물렀는데 이전에 자선사업에 열중했던 팡티에브르 공작에 대해 많은 이들이 존경했으며 이런 상황은 혁명이후 왕가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게 됐어도 팡티에브르 공작이 안전할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과 함께 있는 마리 아델라이드
마리 아델라이드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과 자녀들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죠.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나면서 마리의 남편인 오를레앙 공작과 아들인 샤르트르 공작 모두 전선에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1793년 복잡한 정치적 상황은 그녀의 아들인 샤르트르 공작이 뒤무리에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하기 까지 했었지만 장남이 망명한뒤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체포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기에 오를레앙 공작 역시 1793년 11월에 처형당합니다. 마리 아델라이드의 다른 두 아들은 감옥에 갇혀있다가 미국으로 추방당하죠. 딸은 간신히 스위스로 빠져나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 아델라이드의 남편 "필리프 에갈리테"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
마리 아델라이드는 이때 건강이 매우 나빠서 프랑스에서 머무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가택 연금상태로 지내게 됩니다. 1793년초에 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이 사망했습니다. 비록 마리 아델라이드는 살고 있던 곳에서 계속 지낼수 있었지만 상속 재산은 혁명정부가 압류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뒤 마리 아델라이드는 당시 감옥으로 쓰이던 뤽상부르 궁전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일생의 사랑"이 될 남자를 만나게 되죠. 자크 마리 루젯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재단사의 아들로 혁명에 참여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롱드파가 몰락한뒤 역시 뤽상부르 궁전 갇혀있었고 이곳에서 마리 아델라이드를 만난것이었죠. 마리 아델라이드는 거의 처형당할뻔 하지만 다행히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했으며 이후 다른 감옥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마리 아델라이드의 애인이었던 루젯은 마리 아델라이드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오백인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적극적으로 마리 아델라이드를 위해 일을 하죠. 결국 1796년 마리 아델라이드의 두 아들은 미국으로 갈수 있었으며, 마리 아델라이드는 시누이와 함께 에스파냐로 가게 됩니다. 이때 루젯 역시 마리 아델라이드와 함께 에스파냐로 갔으며, 이후 그녀의 시종으로 그녀 곁에 머물게 되죠.
남편이 죽은 뒤의 마리 아델라이드
마리 아델라이드는 에스파냐에서 부르봉 왕가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1814년 까지 지냈습니다. 이 사이 마리 아델라이드의 자녀들중 장남을 뺀 두 아들들이 병사하죠. 다시 돌아온 마리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유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진행합니다. 혁명정부에 의해 강제로 뺏긴 자신의 재산을 되찾으려 한것이었죠. 하지만 그녀는 1821년 유방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가 죽기전 그녀의 애인이었던 루젯이 미리 사망했는데 마리 아델라이드는 혁명때 파괴된 가문의 영묘를 새로 지으면서 루젯을 그곳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마리 아델라이드 역시 그곳에 묻혔죠.
마리 아델라이드와 오를레앙 공작 사이에는 모두 여섯명의 아이가 있었으며 그중 네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네명중 장남인 루이 필리프는 후에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인물이었죠. 둘째인 아들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 필리프와 막내인 아들 보졸레 백작 루이 샤를은 모두 망명중 사망했으며 정식 결혼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정식 후손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몽팡시에 공작에게는 사생아 아들이 한명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인 마드무아젤 도를레앙 아델라이드는 독신으로 살았는데 오빠인 루이 필리프와 매우 잘 지냈으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고 합니다.
딸 아델라이드 도를레앙
빈터할터 그림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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