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글을 나누기가 좀 애매해요..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34)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에드워드 1세의 왕비 (네번째)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잉글랜드의 왕비
Eleanor of Castile
(1241 – 28 November 1290)
남편과 매우 행복했으며 서로에게 헌신적이었다고 알려진 레오노르였기에 후대에 역사가들은 그녀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그녀가 죽은뒤 아내를 기리기 위한 에드워드 1세의 노력이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에드워드 2세의 노력덕이라고 할수 있을듯합니다.
아들 에드워드 2세와 함께 있는 에드워드 1세
하지만 레오노르는 당대에는 그렇게 인기있는 왕비는 아니었던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녀의 과도한 재산 모으기 방식은 당대 귀족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하는 것중 하나였을듯합니다. 에드워드는 아내가 의회의 도움없이도 지낼수 있게 재산을 부여했었습니다. 주로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린 영주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대신 그 땅을 왕비에게 넘겨주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유대인들이야 그냥 쫓아내면 쫓겨나는 신세..ㅠ.ㅠ)
이런 방식으로 왕비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며 몇몇 영주들은 그녀의 기사나 식솔로 남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돈을 가진 사람들이 왕비에 대해 안좋게 보는 계기였을듯합니다. 이런 상황은 왕비에 대한 가쉽이나 소문따위를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왕비의 주변 사람들은 왕비의 좋은 면만을 봤지만 그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못받았었다고 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존 페크햄
그는 레오노르에게 그녀의 경제활동이 사람들에게 가쉽거리로 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불만을 사고 있다고 경고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레오노르는 남편인 에드워드에게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시어머니였던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가 남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던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죠. 실제로 그녀의 남편인 에드워드는 레오노르의 오빠인 알폰소 10세를 좋게 봤지만 그가 정작 군사가 필요했을때에도 카스티야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지 카스티야 인근의 자신의 영지였던 가스코뉴지방에 기사들을 보낸것이 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레오노르는 남편의 조언자로써 어느정도 역할을 했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는 사랑하는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었다고 합니다. 물론 아내가 과한 행동을 하면 그것은 제지하긴했었지만 말입니다.
에드워드 1세
재미난것은 레오노르는 시어머니인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처럼 자신의 친정식구들을 잉글랜드로 오게 했고 특권을 부여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보다 좀더 조심스럽고 영리한 방법이었죠. 그녀의 시부모는 외국인이었던 왕비의 친정식구들을 잉글랜드의 여성 상속자들과 결혼시켜서 잉글랜드 영지를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레오노르는 자신의 여성 친척들을 잉글랜드의 주요한 귀족들과 결혼시키므로써 이런 불만을 없앴으며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졌다고 합니다.
매우 지적이었으며 교육을 잘 받았던 레오노르는 아마도 정치적인 힘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능력을 예술과 문학에 집중했을듯합니다. 그녀는 문학을 후원했는데 로맨스 소설이나 성인의 삶을 다룬 이야기들을 후원했을듯합니다.뿐만 아니라 그녀는 매우 다양한 문학작품을 후원했으며 이에 대한 책을 자주 냈었죠. 이를테면 레오노르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는 남편을 따라갔을때 남편을 위해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De Re Militari )를 번역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또 로맨스 소설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여러가지 많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책을 냈었다고 합니다. 레오노르는 이런 책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빌려줬으며 교환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오빠인 알폰소 10세와도 책을 교환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책은 요즘 형태가 아니라 양피지에 화려한 채색을 입힌 그런 책입니다. 게다가 한글자한글자 장인의 손으로 만든..-0-;;;;)
또 레오노르는 여러가지 기구들을 사용했으며 정원등을 꾸미는 일 역시 열성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15세기 군사학 논고에 나오는 삽화
레오노르는 평생 건강한 여성으로 살았었습니다. 그 증거가 남편과의 사이에서 모두 열여섯아이를 낳았다는 점을 들수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레오노르의 건강은 1284년 막내인 에드워드를 낳고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현재도 40살이상의 노산은 산모에게 무리가 가는 상황인데 하물며 중세시대에는 더한 일이었죠. 게다가 그녀는 남편과 늘 떨어지지 않았기에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음에도 남편을 따라 이곳저곳을 함께 다녔었습니다. 결국 레오노르는 1290년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으며 결국 1290년 11월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가 죽었을때 그녀의 남편인 에드워드는 매우 슬퍼했으며 아내를 기리기 위해 "엘레노어 십자가"라고 불리는 기념물을 잉글랜드 전역에 세우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재혼하는데 후계자가 될 아들은 에드워드 밖에 없었으며 만약 에드워드가 후계자없이 사망한다면 딸들의 남편들이 잉글랜드의 상속권을 두고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엘레노어의 십자가
19세기
에드워드 1세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물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역사이야기 > 영국의 왕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잉글랜드의 왕비들...(36) 프랑스의 마르거리트 : 에드워드 1세의 왕비 (첫번째) (0) | 2015.07.16 |
---|---|
잉글랜드의 왕비들...(35)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에드워드 1세의 왕비 (다번째) (0) | 2015.07.09 |
잉글랜드의 왕비들...(33)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에드워드 1세의 왕비 (세번째) (0) | 2015.06.25 |
잉글랜드의 왕비들...(32)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에드워드 1세의 왕비 (두번째) (0) | 2015.06.18 |
잉글랜드의 왕비들...(31)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에드워드 1세의 왕비 (첫번째) (0) | 2015.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