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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bel] 카스티야와 레온의 엔리케 4세(첫번째)

엘아라 2015. 5. 2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드디어 이사벨의 주변인물들 합니다만 드라마에 대한 열의가 식어서 말입니다.-0-;;;


[Isabel] 카스티야와 레온의 엔리케 4세(첫번째)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

Henry IV 

(EnriqueHenrique

(5 January 1425 – 11 December 1474),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인 엔리케 4세는 1425년 바야돌리드에서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 후안 2세와 그의 부인인 아라곤의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후안 2세는 엔리케 3세와 그의 아내인 랭카스터의 캐서린의 아들이었습니다. 복잡한 카스티야 정치상황은 카스티야 왕위를 두고 형제들간의 싸움으로 번졌으며 후에는 조카와 숙부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후 잉글랜드가 카스티야 왕위전쟁에 관여하게 되면서 더 복잡해졌었구요. 결국 카스티야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던 랭카스터 공작부인의 딸과 카스티야 왕위계승자였던 엔리케 3세가 결혼하므로써 전쟁이 마무리 된것이었죠.후안 2세는 두번 결혼했는데 첫번째는 사촌인 아라곤의 마리아와 결혼했습니다. 마리아의 아버지인 페르난도는 엔리케 3세의 동생이었는데 외삼촌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아라곤을 물려받았던 것이었죠




엔리케의 아버지

카스티야의 후안2세

후대 상상화-0-;;


엔리케 4세의 아버지인 후안 2세 시절은 정치적으로 많이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후안 2세의 아버지인 엔리케 3세가 일찍 사망하면서 후안2세의 숙부이자 후에 아라곤의 국왕이 되는 페르난도가 섭정이 되었던 것이었죠. 그후에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국왕이 되는데, 페르난도의 둘째와 셋째 아들들이었던 후안과 엔리케는 아라곤의 계승권이 없었기에 기반이 되고 있던 카스티야에 머물면서 세력을 확장하려했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누이인 마리아를 카스티야 국왕과 결혼시켰고 다른 누이인 레오노르를 포르투갈 국왕과 결혼시켰고 후안 스스로는 나바라의 여왕과 결혼하므로써 이베리아 반도 내 국가들 모두를 자신들의 혈연관계로 채워넣을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안 2세는 이런 사촌들을 경계했고 트루히요 공작인 알바로 데 루나에게 권력을 부여했었죠.



트루히요 공작 

알바로 데 루나

그는 후에 카스티야의 왕비인 포르투갈의 이사벨(이사벨 여왕의 어머니)와 관련되어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이사벨 왕비는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구요.



이런 상황은 엔리케 4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데 알바로 데 루나는 엔리케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마리아가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려했을듯합니다. 그는 엔리케의 교육을 책임졌는데, 알바로 데 루나는 엔리케와 비슷한 또래였던 후안 파체코등의 귀족들을 엔리케와 함께 교육시키므로써 엔리케의 세력을 확고하게 굳히려고 했을듯합니다. 결국 1445년 후안2세의 사촌들이었던 아라곤의 안판테들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과 트루히요 공작을 지지하는 세력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엔리케 역시 이 전투에 참여했었죠.이 전투에서 알바로 데 루나측이 승리했는데 이 승리이후 엔리케와 후안 파체코가 권력을 얻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엔리케는 1440년 사촌이었던 나바라의 블란카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 결혼은 1436년 카스티야와 나바라 사이에 있었던 평화협정의 결과로 블란카와 카스티야 국왕의 후계자가 결혼하는것이 협정의 일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1453년 깨지게 됩니다. 엔리케가 블란카와의 결혼무효를 추진한것이었죠. 아마도 이것은 아라곤측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엔리케가 나바라 공주이자 적대세력이었던 아라곤의 후안의 딸인 블란카와의 결혼을 깨므로써 영향력을 완전히 끊으려한것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무효의 공식 이유였던 "결혼의 미완성"은 의사에 의해서 확인되었는데 이 상황은 훗날 엔리케의 결혼생활과 후계자 문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블란카는 결혼 13년후에도 "처녀"였다는것이 확인되었고 이 상황은 엔리케측이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교황의 공식 결혼무효 문서에는 블란카의 "마녀행위"때문이라고 명기하므로써 엔리케에 대한 소문을 회피하려했다고 합니다.


엔리케의 첫번째 부인

나바라의 블란카

후에 나바라의 여왕


결혼무효화한 다음해인 1454년 엔리케의 아버지인 후안 2세가 사망하고 엔리케가 이제 엔리케 4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는 즉위하면서 어린 동생들과 새어머니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인후안 2세는 유언으로 젊은 새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한 재산을 남겼지만 엔리케는 아버지의 유언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으며 이때문에 이사벨과 알폰소는 어린시절 곤궁한 처지였었다고 전해집니다.


즉위 다음해인 1455년 엔리케는 포르투갈의 공주인 후아나와 재혼하게 됩니다. 후아나와 엔리케의 결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쑤근댔었는데 엔리케의 이전 결혼이 무효화된 이유때문이었죠. 그리고 이런 상황은 결혼한지 6년쯤이 지난 1462년 후아나가 딸을 낳게 되면서 더 혼란한 상황이 됩니다.


포르투갈의 후아나

엔리케의 두번째부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