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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34) 카트린 앙리에트 드 발자크 당트라그 : 앙리 4세의 정부

엘아라 2015. 2. 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제 할 여성은 앙리 4세의 정부들중 제일 탐욕스러웠던 여성입니다. 앙리 4세가 마리 드 메디시스랑 결혼하기 전에 이 카트린한테 결혼서약서 써주는 바람에 엄청 골치아팠다고 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이분 이야기 읽으면 왠지 찰스 2세의 정부였던 레이디 캐슬마인이 떠오른다죠.-0-;;;;

(아 찰스 2세 이야기하면 얼마나 재미날지.....-0-;;;)


정부들과 그 후손들...(34) 카트린 앙리에트 드 발자크 당트라그 : 앙리 4세의 정부



카트린 앙리에트 드 발자크 당트라그

베르누이 여후작(후작부인)

Catherine Henriette de Balzac d'Entragues, 

Marquise de Verneuil 

(1579–1633)


카트린 앙리에트 드 발자크 당트라그는 마리 투셰와 그녀의 남편이자 오를레앙의 행정관이었던 프랑수아 드 발작크 당트라그 후작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 투셰는 샤를 9세의 정부로 그의 아들인 앙굴렘 공작 샤를을 낳았었죠.



마리 투셰

카트린 앙리에트의 어머니

샤를 9세의 정부


카트린 앙리에트는 어머니가 국왕의 정부였던 여성답게 매우 야망이 컸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아름답고 똑똑했었으며 야망또한 컸었던 카트린 앙리에트는 국왕인 앙리 4세에게 접근하게 됩니다. 그녀와 앙리 4세가 만났을 무렵 앙리 4세는 사랑했었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스를 잃은 뒤였고 슬픔에 바진 국왕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슬픔을 치료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댓가는 좀 비쌌었습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국왕은 엄청난 돈을 지급했었으며 심지어 아들을 낳는다면 결혼하겠다는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앙리 4세


사실 이때 앙리 4세는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결혼협상중이었고 카트린 앙리에트와의 결혼 약속은 엄청난 문제가 되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앙리 4세가 신하에게 이 사실을 밝혔을때 그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뿌려야만했습니다. 게다가 주변 인물들의 반발도 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카트린 앙리에트의 이부오빠였던 앙굴렘 공작 샤를이었죠. 카트린 앙리에트는 앙리 4세가 마리 드 메디시스와 결혼하기전 아들을 낳았지만 아이는 사산되었었습니다. 결국 앙리 4세는 무사히 마리 드 메디시스와 결혼할수 있게 되었고 그는 다정한 연인으로 다시 카트린 앙리에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왕비자리를 뺏긴 카트린 앙리에트는 대신 엄청난 재산을 받아 챙겼었죠.



카트린 앙리에트

가브리엘 데스트레스 초상화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라고 하네요.


앙리 4세는 자신의 정부인 카트린 앙리에트를 당시 전통대로 왕비의 시녀로 두기로 합니다. 마리 드 메디시스는 이런 상황을 인내해야했었는데 이것은 곧 두 여인의 다툼으로 번지게 됩니다. 왕비는 지위로써 카트린 앙리에트를 누르려했고, 카트린 앙리에트는 메디시스 가문이 장사꾼 가문이며 왕비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들어 비웃었었죠. 이런 상황은 두 여인들간의 큰 싸움으로 번졌었죠.


마리 드 메디시스는 결혼한 다음해에 앙리에게 후계자를 낳아줌으로써 프랑스의 왕비로써의 의무를 완수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얻은것은 아니었습니다. 앙리는 여전히 카트린 앙리에트에게 마음이 가있었죠. 카트린 앙리에트는 왕비와 비슷한 시기에 아들과 딸을 낳았고 이 아이들은 1603년 적자로 인정받았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은 마리 드 메디시스가 더 열받는 상황이었을듯합니다.


마리 드 메디시스

1605년


카트린 앙리에트는 앙리 4세의 총애받던 여성이었으며, 그녀의 아들 역시 적자인 루이보다 더 사랑받았었죠. 이런 상황은 정치적 음모를 낳게 만듭니다. 1604년 카트린 앙리에트의 아버지와 이부 오빠였던 앙굴렘 공작 샤를은 음모로 체포되었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카트린 앙리에트 역시 한동안 궁정에서 내쳐지게 됩니다만, 1607년경 앙리 4세는 그녀와 아이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였으며 정부 지위를 유지하게 했었다고 합니다. 


카트린 앙리에트의 이부 오빠

앙굴렘 공작 샤를

샤를 9세의 서자

그는 이때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후에 감형되었으며 루이 13세때 복권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608년 카트린 앙리에트는 다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려는 음모에 연루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사실을 알게된 앙리 4세는 카트린 앙리에트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됩니다. 아마 그가 오래도록 살았다면 카트린 앙리에트는 다시 궁정으로 불려갈수도 있었을것입니다만, 앙리 4세는 1610년 암살당했고 오래도록 그녀를 미워해왔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미성년인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이 되면서 카트린 앙리에트는 궁정에서 완전히 추방당하게 됩니다.


카트린 앙리에트는 1633년 55살의 나이로 홀로 쓸쓸히 사망했다고 합니다.



카트린 앙리에트

베르누이 후작부인(여후작)


앙리 4세와 카트린 앙리에트 사이에는 두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이었던 앙리는 베르누이 공작으로 어려서부터 사제로 키워졌다고 합니다. 딸인 가브리엘 안젤리크는 Épernon공작과 결혼해서 두 자녀가 있었지만 일찍 사망했습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침실 권력(허먼/박아람2010)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