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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32) 방돔 공작 세자르의 후손들

엘아라 2015. 1. 1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세자르의 아들과 손자들을 한명씩 할까 고민했는데 그럼 일이 많아져서 그냥 가계를 묶어서 이야기해볼까합니다. 방돔 공작가문도 결국은 세자르의 손자대에 남성직계가 단절되거든요.

그래서 그냥 적당히 해볼까합니다.-0-;;;


정부들과 그 후손들...(32) 방돔 공작 세자르의 후손들


방돔 공작, 보퍼트 공작,에탕프 공작이었던 세자르는 메르퀴르 여공작이자 팡티에브르 여공작이었던 프랑수아즈 드 로렌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 세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둘의 첫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방돔 공작이 되는 루이로 그는 마자랭의 조카였던 로라 만치니와 결혼했었죠. 이 결혼은 세자르가 마자랭과 모후였던 안 도트리슈와의 화해하는 의미로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루이 

방돔 공작



로라 만치니

방돔 공작부인


세자르의 둘째아들인 프랑수아는 아버지로부터 "보퍼트 공작"지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역사에서 매우 눈에 띄는 인물이었습니다. 앙리 4세의 손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엄청난 상속녀였었죠. 그는 군인으로 시작햇지만 결국 궁정음모에 가담하게 됩니다. 특히 리슐리외가 죽은뒤 마자랭이 실권을 잡자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했으며 여기에 아버지인 세자르까지 연루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도망쳐서 프롱드의 난에 가담합니다.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으며 이때문에 파리시민들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는 자신의 총리가 되길 바랬지만 다른 정치인들은 그를 그냥 이용할뿐이었다고 합니다. 지적이긴 했지만 무능력했고 결정적으로 군인으로써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는 여동생의 남편을 결투로 죽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마자랭이 정권을 장악한뒤 프랑수아는 결국 망명했다가 다시 용서받고 궁정으로 돌아왔으며 해군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가 1669년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미혼으로 사망했습니다.



프랑수아

보퍼트 공작


세자르의 딸인 엘리자베트는 느므르 공작이었던 샤를 아마데 드 사보이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느므르 공작은 프랑스쪽에 정착한 사보이 가문의 분가의 일원이었죠. 재미난것은 샤를 아마데 드 사보이의 어머니는 아녜스 소렐과 샤를 7세의 후손으로 디안 드 푸아티에의 후손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디안 드 푸아티에의 남편이 아녜스 소렐의 외손자입니다.) 느므르 공작 부부 사이에서는 여러 아이가 태어났지만 성인으로 성장한 아이는 두 딸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의 남편인 샤를 아마데우스는 엘리자베트의 오빠와 결투중 사망했습니다. 엘리자베트의 딸인 마리 잔느는 사보이 공작인 카를로 엠마누엘 2세와 결혼했으며 그녀의 후손은 사보이의 국왕이 되었죠. 

엘리자베트의 둘째딸인 마리 프랑수아즈는 포르투갈의 국왕인 알폰수 4세와 결혼했었는데 그와의 결혼을 무효로한뒤 알폰수의 동생인 페드루와 결혼합니다. 페드루는 형의 뒤를 이어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가 되면서 마리 프랑수아즈는 포르투갈의 왕비로 남았습니다.



엘리자베트

느므르 공작부인


세자르의 장남인 루이는 로라 만치니와의 사이에서 모두 세명의 아들을 둡니다만 그중 두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루이의 장남이자 세자르의 손자였던 루이 조제프는 아버지로부터 방돔공작 칭호를 물려받습니다. 그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는데 그는 55살의 나이로 그보다 24살이나 어리던 콩데공의 딸이었던 마리 안 드 부르봉과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둘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루이 조제프

방돔 공작


루이의 둘째아들인 필리프 역시 군인으로평생을 보냈으며 미혼으로 살았습니다. 형이 죽은뒤 형의 지위를 물려받았지만 결국 남성직계 후손이 없었기에 결국 방돔 공작령은 왕가로 다시 귀속되게 됩니다.



필리프

방돔 공작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