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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33) 카트린느 드 부르봉과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의 자녀들

엘아라 2015. 1. 2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둘을 따로 할려니까 알렉상드르 자료가 너무 없어서 그냥 합쳐서 하기로 했습니다.


정부들과 그 후손들...(33) 카트린느 드 부르봉과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의 자녀들



카트린 앙리에트 드 부르봉

마드무아젤 드 방돔

엘뵈프 공작부인

Catherine Henriette de Bourbon 

(11 November 1596 – 20 June 1663)


카트린 앙리에트 드 부르봉은 1596년 11월 11일 루앙에서 앙리 4세와 그의 정부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의 둘째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카트린이 태어난 직후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 상황은 매우 복잡했는데 카트린의 어머니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스는 앙리 4세를 위해 자신의 보석등을 저당잡히면서까지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데 도와줬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은 아마도 앙리 4세가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에게 더욱더 호의적이 되는 결과를 낳았을듯합니다.



자매와 함께 있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스

저 반지의 의미가 앙리 4세가 결혼할거라는 의미던가 그렇습니다.


카트린은 오빠인 세자르가 "방돔 공작"이었던것 때문에 "마드무아젤 드 방돔"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카트린이 3살이 되던해 어머니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스가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스는 국왕의 총애와 이전의 많은 행동으로 인해 매우 부유했었는데 이때문에 카트린 역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머니의 재산을 상속받아서 매우 부유한 상속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앙리 4세는 자신의 서자들을 적자들과 함께 교육시켰고 왕비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는 이에 매우 불만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카트린 역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궁에서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육받았을듯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카트린이 성인이 되기전 끝나게 되는데 그녀가 열네살무렵이었던 1610년 아버지 앙리 4세가 암살당했으며 8살이었던 이복동생 루이 13세가 즉위하게 되면서 서자들을 끔찍히 싫어했었던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이 됩니다. 마리 드 메디시스는 남편의 서자들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결국 이런 상황은 카트린이 궁정에 남아있는 것을 순탄치 않게 했을듯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있는 앙리 4세

저기 앉아있는 여성은 아마도 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일듯합니다만..

저기 목마태워주고 있는 아들이 과연 루이 13세일지는..ㅎㅎㅎㅎ


카트린은 상속녀였으며 국왕의 총애받는 딸이었기에 여러 혼담이 들어오게 됩니다. 가장 유력한 가문과의 혼담은 콩데공이었던 앙리와의 혼담이었습니다. 앙리 4세는 부르봉 가문의 분가이자 자신의 직계 후손들이 단절될 경우 다음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콩데 가문으로 딸인 카트린을 시집보내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콩데 공은 몽모렝시 공작의 딸과 결혼하게 되죠. 

이후 앙리4세는 유력한 귀족가문이었던 몽모렝시 가문으로 딸을 시집보내고 싶어했습니다만 이 혼담은 앙리 4세가 암살당하면서 없었던 일이 됩니다.



콩데 공 앙리

콩데 가문은 부르봉 가문의 분가중 하나로 조상은 앙리 4세의 아버지인 앙투안 드 부르봉의 동생으로 부터 시작된 가문이었습니다. 콩데 가문의 분가로 콩티 가문이 있었으며 앙리 4세때는 이 콩데 공 앙리가 앙리 4세의 아들이 태어날때까지 추정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었다고 합니다.



결국 카트린과 결혼하게 된 인물은 로렌 가문의 분가였던 기즈가문 출신인 엘뵈프 공작 샤를 드 기즈였습니다. 그는 루이 13세의 총신으로 모후에 대항하던 루이 13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25살의 카트린은 자신보다 몇달 어린 샤를 드 기즈와 1619년 파리에서 결혼했습니다. 

엘뵈프 공작과 결혼할때 카트린은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녀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엄청났기 때문이었죠. 결혼후 카트린은 "적자"로써 인정받은 것을 공식화 하게 됩니다. 다시말해서 법적으로 앙리 4세가 인정한 적자라는 것이었죠. 아마도 이것은 "외국 왕족"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던 엘뵈프 공작과의 결혼에서 카트린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듯합니다.



엘뵈프 공작 샤를 2세

샤를 드 기즈


카트린은 엘뵈프 공작과의 사이에서 여섯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다섯명이 성인으로 성장했고 세명이 결혼해서 후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엘뵈프 공작의 직계는 단절되게 됩니다.



엘뵈프 공작의 문장


카트린의 동생인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은 결혼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그다지 이야기가 없습니다.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슈발리에 드 방돔

Alexandre, 

Chevalier de Vendôme 

(1598–1629).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은 앙리 4세와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의 셋째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형인 세자르가 "방돔 공작"지위를 받은것때문에 "슈발리에 드 방돔"이라는 칭호로 불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 죽을때까지 그는 캉의 영주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1604년에는 몰타 기사단에 들어가기도 했었습니다.(..몰타 기사단도 들어가면 독신으로 살아야하는 것아니었나..-0-;; 성전기사단은 그랬는데 이게 헷갈리네요) 

그리고 1614년, 루이 13세는 이복형이었던 알렉상드르를 교황청에 보내는 대사로 임명하기도 했었죠.


알렉상드르는 1626년 리슐리외 추기경을 암살할려는 음모에 형인 세자르와 이복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과 함께 휘말리게 됩니다. 알렉상드르는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성의 감옥에 갇히게 되죠. 그리고 그곳에서 사망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