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엘레오노르 이야기는 왠지 쓰기가...ㅠㅠ
책을 읽는 편이 더 나은데 말입니다.
앨리슨 위어 책의 번역판이 나와있으니 많이 읽어주세요-0-;;;;
저 그 책 영문판보고 울었었거든요. 진짜 영어실력이 별로인데 그 책 읽으려니 삶이 우울하더이다.-0-;;
한글로 읽는 책이 너무 좋아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13)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헨리 2세의 왕비(세번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아키텐의 여공작,푸아투의 여백작
한때 프랑스의 왕비
잉글랜드의 왕비
Eleanor of Aquitaine
(1122 or 1124 – 1 April 1204)
엘레오노르의 이혼
15세기
엘레오노르와 루이의 결혼은 단순한것이 아니었으며 이때문에 그녀가 이혼을 원한다고 해도 쉽게 이혼할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먼저 엘레오노르의 상속영지는 굉장히 부유했으며 영지 자체도 매우 컸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에서는 이를 쉽게 포기할수 없었죠.
루이7세의 조언자였던 쉬제는 엘레오노르와 루이의 결혼이 계속 유지 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랑스 왕실 전체에 유리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유지하게 하려했었죠. 특히 둘사이에 후계자가 있다면 결혼생활이 훨씬 더 쉬워질것이라고 설득햇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이 7세는 수도사로써 키워졌으며 이런 그의 성정은 엘레오노르의 삶과 맞지 않았죠. 1145년 첫딸인 마리가 태어났고 1150년에는 둘째딸인 알릭스가 태어나지만 둘의 결혼은 더 지속되기 힘들게 됩니다.
둘째딸인 알릭스가 태어나면서 루이는 심각하게 자신의 후계자 문제를 고민하게 됩니다. 자신의 왕국을 상속할 아들이 필요한 시점이었음에도 서른 가까운 나이에 아들이 없었죠. 그리고 루이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이 신께서 보기에 맞지 않는 결혼(근친관계)였기에 후손이 없는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루이 7세의 조언자인 쉬제가 죽으면서 더이상 엘레오노르와 루이의 결혼을 지속해야한다고 압력을 넣는 사람이 없게 되죠.
루이 7세
1151년 루이는 엘레오노르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내와 평화롭게 헤어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결혼을 무효로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1151년 9월 아키텐으로 함께 가서 프랑스군의 철수를 지켜봤으며 이후 엘레오노르는 아키텐에 그대로 있었고 루이는 파리로 돌아가죠. 1152년 주교회의를 열어 둘사이의 근친관계때문에 결혼이 무효가 됨을 선언했으며 3월 교황의 승인이 떨어지게 되죠. 하지만 이때 프랑스에서는 둘의 이혼이 엘레오노르의 부정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이미 평판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엘레오노르가 이혼당하게 된것은 당연하다는 느낌이었을듯합니다.
결혼 무효화가 이루어지기전에 세부적인 상황은 이미 합의된 상황이었습니다. 여전히 엘레오노르는 루이의 봉신이었으며 루이는 엘레오노르의 영지를 결혼전 상태로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었죠. 둘의 자녀들은 적자로써 루이의 보호아래 있게 되죠.
사실상 이상황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음유시인의 표현대로 차라리 루이가 엘레오노르를 부정을 핑계로 투옥하는 편이 더 나았다는 이야기가 옳을것입니다. 하지만 루이 7세는 정치가라기 보다는 수도사에 가까웠고 이런 나쁜일은 할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의 우유부단함은 결국 프랑스가 오래도록 잉글랜드와 투쟁하는 상황을 만들게 되죠.
푸아티에 성
푸아투에 있는 이 성은 아키텐 공작의 주 거주지중 하나였습니다.
엘레오노르 같이 부유한 상속녀가 보호자(아버지,남편,아들)없이 홀로 지낸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와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상위 군주와 혼약을 맺었던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었죠. 아마도 엘레오노르 역시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 무효화 절차를 들어가기 이전에 남편감을 선택했었습니다. 1151년 8월 앙주 백작이 된 앙주의 앙리가 파리로 오게 됩니다. 그는 이전에 이미 무력투쟁을 통해서 어머니로부터 상속권을 물려받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장악했었고 상위군주인 루이를 압박해서 이를 인정받기도 했었죠. 이때 루이는 또다른 정치적 문제때문에 파리에 왔었고 이곳에서 아름다운 왕비를 만났을듯합니다. 그리고 엘레오노르는 루이와 헤어졌을때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줄만한 남자로 자신보다 10살정도 어린 앙리가 적당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듯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와 앙리는 결혼무효후에 서로 결혼하기로 의견을 모았을것입니다.
1152년 결혼무효가 선언된 뒤 엘레오노르는 실제로 납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엘레오노르는 서둘러 앙리에게 결혼을 위해 아키텐으로 와달라고 사신을 보냅니다. 그리고 아키텐에서 봉신들을 모았으며 결혼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곳에서 새로운 남편감에 대해서 이야기했을것입니다.
앙리 역시 이시기 봉신들을 모았는데 그의 목적은 자신의 상속령지인 잉글랜드에 정복에 대한 이야기를 위한것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여기서 그는 자신의 결혼계획을 봉신들에게 이야기했으며 결국 찬성을 얻어서 아키텐으로 가게 되죠.
앙주 백작 앙리
노르망디 공작
이 결혼은 속전속결로 이뤄지게 되는데 엘레오노르가 부활절 무렵 앙리에게 사신을 보냈고, 앙리는 4월초 봉신들과 만나뒤 서둘러 아키텐으로 갑니다. 그리고 5월 중순에 아키텐에 도착한 직후 엘레오노르와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죠. 20살 무렵의 신랑과 30살 무렵의 신부는 화려한 축제가 아니라 매우 소박하다 못해 은밀하기까지 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들은 서로의 결혼을 상위 군주인 루이 7세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당연히 이 결혼을 반대할것이 분명했었죠. 게다가 엘레오노르는 친족관계를 이유로 루이와 이혼을 해놓고 바로 친족관계였던 앙주 백작과 결혼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앙리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은 루이 7세를 격분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프랑스내에서 엄청나게 큰 영지를 가진 두 영주가 결혼했고 특히 엘레오노르가 서둘러 루이의 앙숙이기도 한 앙리와 결혼한것은 아마도 루이 7세가 반역이라고 여기기에 충분했을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둘의 숙적들 역시 루이 7세를 부추기게 되죠.
결국 루이 7세는 앙리의 동생인 조프루아와 블루아 백작등과 함께 앙리를 처단하겠다는 군사를 일으켰지만 도리어 앙리에게 패배했으며 결국 둘의 결혼을 인정하는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이 7세
앙리는 또한 아키텐의 사나운 봉신들을 잠재우기도 했었는데 앙주 가문은 프랑스의 다른 어느 가문 못지 않게 호전적이었으며 이런 앙리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마도 앙리는 반항적인 봉신 하나를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었을듯한데 거기에 한 영주가 걸려들게 됩니다. 그리고 앙리는 본보기로 그의 성벽을 무너뜨리므로써 다른 영주들에게 본보기를 보였고 새 공작에게 함부로 반기를 들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이렇게 엘레오노르는 상위 군주인 루이 7세와 결별했으며, 자신을 보호해줄만한 강력한 남편을 찾는데 성공했었죠.
자료출처
앞쪽과 동일
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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