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12)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헨리 2세의 왕비(두번째)

엘아라 2014. 12.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 새해 특집쓰는 기분입니다..

어떻게 줄여야할지 진짜..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12)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헨리 2세의 왕비(두번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아키텐의 여공작,푸아투의 여백작

한때 프랑스의 왕비

잉글랜드의 왕비

Eleanor of Aquitaine 

(1122 or 1124 – 1 April 1204) 

아마 프랑스 왕비 시절일듯...


중세시대의 여성군주라는 지위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중세시대 여성의 권리는 매우 미약했는데 그녀 스스로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하는것은 매우 어려웠죠. 아버지,남편,아들,후견인등의 보호아래서 그 재산권을 행사할수 있었으며,이런 적당한 보호자가 없는 경우 그녀의 신변은 보장받을수 없었습니다. 특히 엘레오노르 같은 상속녀들은 표적이 되었는데 그녀의 재산과 지위는 그녀의 남편 소유가 될것이기에 그녀를 보호해줄만한 인물이 없다면 납치해서 강제로 결혼당할 우려가 있었죠.


엘레오노르의 아버지인 기욤 10세는 죽기전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상위군주였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6세에게 딸을 맡기면서 그의 후계자와 딸의 결혼을 요청합니다. 물론 아키텐 공작령의 독립을 위해서 프랑스 국왕이 아닌 엘레오노르의 후계자에게 공작령을 상속시킨다는 조건을 붙여서 말입니다. 하지만 루이 6세에게는 이것은 아키텐 공작령을 프랑스 왕가에 귀속시킬 중요한 제안이었으며 결국 공작의 조건을 수락합니다. 



루이 6세



루이 6세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루이를 아키텐으로 보냈습니다. 1137년 여름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인 루이는 그곳에서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고 엘레오노르의 권리로 아키텐 공작등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죠. 물론 봉신들중에서는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루이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을 인정했었죠. 그리고 파리를 향해 가던중 엘레오노르는 시아버지인 루이 6세의 죽음을 전해듣습니다. 10대 중반이었던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지위에  이제 "프랑스의 왕비"라는 지위까지 더하게 되죠.


엘레오노르의 남편인 루이는 이제 프랑스의 루이 7세가 됩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오래도록 교육받았기에 매우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정치에서는 "능숙하지 못하다"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닐 인물이었죠. 그는 엘레오노르보다 세살정도 많았지만 아름다운 엘레오노르를 매우 사랑했으며 궁정에서 자란 엘레오노르보다는 좀더 순진한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루이는 아름다운 아내를 위해서 아내가 원하는것을 다 해주려했었죠. 하지만 엘레오노르의 생활은 파리에서 볼때 과도하게 사치스러운면이 있었으며 또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자유로웠던 남부 지방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하는 엘레오노르에 대해서 파리의 궁정은 아마 크게 경악했으리라 추정할수 있습니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


게다가 엘레오노르 주변 인물들 역시 스캔들을 일으키는 대상이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여동생인 페르로닐라였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30살이나 넘게 연상이었던 유부남 베르망두아 백작과 불륜관계에 빠진것이었죠. 여동생과 사이가 좋았던 엘레오노르는 당연 동생을 위해서 베르망두아 백작이 결혼을 무효화하고 동생과 결혼하는 일에 적극 지지합니다.하지만 이 상황은 루이의 봉신이었던 베르망두아 백작의 처남인 상파뉴백작의 불만을 일으켰고 결국 루이가 교회와 불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죠. 신앙심이 깊었던 루이에게 이런 상황은 매우 난감한것이 아닐수 없었을것입니다.


루이는 아마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아내를 사랑했을테지만 루이의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성정은 아마도 엘레오노르의 불만을 샀을것입니다. 게다가 결혼하고도 오래도록 자녀가 없었던것도 아마 엘레오노르와 루이 사이를 멀어지게 한 원인이었을것으로 추정할수 있습니다. 물론 결혼 8년만인 1145년에 딸인 마리가 태어나게 됩니다만 아마도 아이가 태어난이후에도 둘사이는 점차 멀어져가게 됩니다.



아마도 엘레오노르가 루이와의 결혼에 회의를 느꼈을것이라 추정하는데 결정적 계기는 바로 루이 7세의 십자군 참전이었을것입니다. 루이는 군대는 물론 아내인 엘레오노르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부부는 심하게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엘레오노르는 자신보다 다른이의 의견을 따르는 루이에게 불만을 품었을것이며 루이는 늘 궁정에서 스캔들을 일으키는 아내에 대해서 뭔가 해야한다고 생각했을듯합니다. 특히 안티오크에서 엘레오노르는 안티오크의 군주이자 그녀의 숙부였던 레몽과 친하게 지냈는데 당대 기준으로 볼때 둘의 사이가 숙부-조카 이상의 사이로보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스캔들에 대해서 루이는 난감해했을것이며, 이런 남편에 대해서 엘레오노르는 믿음을 못가졌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게다가 루이의 십자군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엘레오노르는 죽을 고생을 해가면서 간신히 프랑스로 돌아올수 있었죠. 이런 상황은 아마도 엘레오노르가 루이와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2차 십자군 전쟁때 참전한 세명의 국왕들

독일의 콘라드 3세, 프랑스의 루이 7세.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


자료& 그림출처

앞쪽과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