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11)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헨리 2세의 왕비(첫번째)

엘아라 2014. 12. 1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하하..드디어 올것이 왔습니다.-0-;;;;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진짜..ㅠ.ㅠ

어떻게 줄여야할까요..음냐..


그런데 이제까지 계속 아퀴텐이라고 썼었는데 지금 책을 보니까 "아키텐"이군요.-0-;;;

이런이런 Aquitaine이라서 아퀴텐이라고 읽었었는데 표준 외래어 표기로는 아키텐인가 보군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11)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헨리 2세의 왕비(첫번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아키텐의 여공작,푸아투의 여백작

한때 프랑스의 왕비

잉글랜드의 왕비

Eleanor of Aquitaine 

(1122 or 1124 – 1 April 1204) 

19세기 상상화..-0-;;

아마도 미모로 이름이 높았다니까 일단 예뻤긴했을겁니다..ㅎㅎㅎ


중세 최고의 상속녀였으며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국왕들과 차례로 결혼하는등 중세시대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중 한명이었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가족관계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아키텐 공작이었던 기욤 10세와 그의 부인인 아에노르 드 로슈코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현재로 봐서도 매우 말이 많은 결혼이었습니다.



아키텐 공작이었던 푸아투 가문의 문장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투의 백작이며 엘레오노르의 할아버지였던 기욤 9세는 역시나 스캔들 메이커중 하나였습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의 관점에서보면 이해하기 힘든 난잡한 시등을 썼으며 시인들을 후원하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했던 인물이었지만 이익을 위해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이웃 영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하거나 기독교적 윤리에 반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해서 결국 파문당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엘레오노르의 할머니인 툴르즈의 필리파 여백작에게 견디기 힘든것으로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견디기 위해서 종교에 더 몰입하게 되었죠. 이런 상황이 되자 공작은 대놓고 바람을 피웠는데 샤틀를로 자작부인이었던 당제로사에게 열렬한 감정을 느낀 공작은 자작부인을 납치해서 자신의 궁정으로 데려갔었습니다. 기욤 9세의 정부가 된 당제로사는 가문의 이익을 생각했고 자신의 딸을 공작의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하게 되죠.-0-;;;;;;;

그래서 기욤 9세와 필리파 공작부인의 아들인 기욤과 당제로사와 샤틀를로 자작의 딸인 아에노르 드 로슈코프가 결혼하게 된것이었죠.



엘레오노르의 할아버지 

기욤 9세



기욤9세의 아들인 기욤 10세는 아마도 이 결혼에 대해서 탐탁치 않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당제로사를 데려오는 바람에 수도원으로 은퇴해버렸으며,이때문에 아버지나 당제로사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였을 가능성이 컸을듯합니다. 아에노르 역시 그다지 마음내키는 결혼은 아니었을듯합니다. 하지만 중세시대는 가부장적 사회였고 여성인 아에노르는 말할것도 없고, 공작의 아들인 기욤조차도 아버지이자 주군이었던 기욤 9세의 뜻을 거스를수는 없었을듯합니다.


기욤 10세와 아에노르 사이에는 모두 세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장녀가 바로 엘레오노르였으며 차녀는 페트로닐라 였고 막내가 후계자가 될 아들인 기욤 에그레였습니다. 하지만 1130년 공작부인과 기욤 에그레는 사망하고 말죠.엘레오노르는 이제 8살의 나이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공작령의 추정상속녀가 됩니다. 아키텐 공작령은 부유하고 강력했지만 이 강력함은 사나운 봉신들에게 나오는 것이었고 이 봉신들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공작의 실권은 무의미했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기욤 10세는 이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죠. 게다가 그는 역시 아버지처럼 파문의 위기에 놓여있었는데 대립교황을 지지하는 바람에 교회의 미움을 샀으며 심지어 교회 특사앞에서 허세부리다가 기절하는 모습까지 보여줬기에 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었습니다.


교황의 사절에게 제압당해서 기절한 기욤 10세

=-=;;;;;


비록 공작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지만 아키텐은 부유했고 엘레오노르 역시 이런 부유한 공작의 궁정에서 성장합니다. 엘레오노르의 교육은 매우 훌륭했을것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녀의 할아버지인 기욤 9세의 궁정은 "트루바두르"라고 불렸던 음유시인등의 작가들의 중심지였으며 이런 경향은 그녀의 아버지대에도 지속되었고 훗날 엘레오노르도 후원했던것으로 봐서 그녀 역시 이런 문학에 관심이 많았을것으로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아퀴텐 공작의 궁정은 매우 호화롭고 세련됐으며 이런 곳에서 성장한 엘레오노르는 당연히 패션등에도 뛰어난 감각을 가지게 되었을것입니다. 

또 엘레오노르는 모국어를 읽고 쓰는것은 물론 라틴어도 배웠을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남성 귀족들도 문맹이 많았던 시기에 여성에게 이런 교육을 하는것은 매우 흔치 않은 일이었죠.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인 공작은 자신에게 아들이 태어나지 않을 경우 딸이 공작령을 상속받아야 할것이며 이를 위한 준비도 어느정도 시켰던듯합니다. 엘레오노르는 사냥도 좋아했는데 특히 매사냥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 여성들의 필수 덕목이었던 바느질이나 가솔들을 통솔하는것 역시 배웠었죠.


기욤 10세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재혼을 하려했지만 그 전에 성 야보고의 성지로 순례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성야보고의 길인듯하네요..) 하지만 그는 이때 혹시나 자신이 어떠게 될지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신들에게 자신의 열네살된 장녀 엘레오르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합니다. 그녀를 군주로써 모시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죽게 된다면 소용없다는것을 알고 딸의 이익을 지켜줄만한 후견인을 모색합니다. 바로 그의 상위군주였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6세에게 그의 후계자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겠다는 조건을 내건것이었죠.

그리고 기욤 10세는 1137년 순례여행중 식중독을 일으켰고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열다섯살의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작령과 푸아투 백작령을 상속받은 상속녀가 됩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대 성당

성 야고보의 길이라고 더 잘알려진 순례여행의 종착점

기욤 10세가 지난 길은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상당부분이 그의 영지를 지나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곳 대성당에서 성찬식후 사망했으며 이곳에 묻혔습니다.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Bas%C3%ADlica_de_Santiago_02.JPG


자료출처

1.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앨리슨위어/곽재은.루비반지)

2.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