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오랫만에 이 파트를 보니 새롭군요.-0-;;;;;
정부들과 그 후손들...(8)프랑수아즈 드 푸아 : 프랑수아 1세의 정부
프랑수아즈 드 푸아
샤토브리앙 백작부인
Françoise de Foix,
Comtesse de Châteaubriant
(c. 1495 – 16 October 1537)
프랑수아즈 드 푸아는 로트렉 자작인 장 드 푸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프랑수아즈의 가문 역시 프랑스의 오랜 귀족가문인데 재미난 것은 그녀는 나바라 국왕이나 프랑스 왕비와 친척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피에르 드 푸아는 나바르의 여왕인 레오노르와 결혼한 가스통 드 푸아의 동생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나바라의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페뷔스(프란시스코 페보)와는 육촌관계이기도 했습니다. 또 가스통 드 푸아의 딸은 후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결혼했고 여기에서 태어난 딸이 브르타뉴의 상속녀였던 안드 브르타뉴로 안 드 브르타뉴와 프랑수아즈 드 푸아 역시 육촌 관계였죠. 재미난 것은 안 드 브르타뉴의 딸인 클로드는 프랑스 공주이자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속녀로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수아즈의 육촌
안 드 브르타뉴
브르타뉴 여공작
프랑스의 왕비
샤를 8세&루이 12세의 왕비
육촌 관계였기에 프랑수아즈는 안 드 브르타뉴의 궁정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샤토브리앙 백작인 장 드 라발을 만나게 됩니다. 1505년 둘의 약혼은 성립되는데 1508년 정식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프랑수아즈는 딸인 안을 낳았습니다. 이후 둘은 1509년 정식으로 결혼했었죠. 결혼후 부부는 샤토브리앙 백작의 성에서 한동안 조용히 살았었습니다. 1516년 프랑수아 1세는 샤토브리앙 백작 부부를 궁정으로 불렀으며 이제 프랑수아즈는 프랑스 국왕의 궁정으로 가게 됩니다.
프랑수아즈의 남편
장 드 라발
샤토브리앙 백작
매우 키크고 짙은 머리로 묘사되는 프랑수아즈는 매우 교양있는 인물로 그녀는 프랑스어 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를 말할줄 알았으며 시를 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물이었던 프랑수아즈가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매우 교양있는 인물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의 아름다운 프랑수아즈에게 관심이 많았고 이런 관심은 그녀 가족들의 지위에 영향을 주게 되죠. 그녀의 남편인 샤토브리앙 백작은 군사령관이 되었으며 형제들 역시 지위가 올라가게 됩니다. 국왕의 이런 사례는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국왕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프랑수아즈는 국왕의 정부가 됩니다. 1519년 도팽 루이의 세례식을 묘사한 그림에서 프랑수아즈는 국왕의 정부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것이 그녀가 국왕의 공식 정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황에 대해서 가장 못마땅해했던 인물은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루이즈 드 사보이로 그녀는 푸아 가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프랑수아즈가 아들의 공식 정부가 된것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합니다.
재미난것은 프랑수아즈의 남편인 샤토브리앙 백작은 아내가 국왕의 정부가 된것에 놀랐지만 그에 대해서 그다지 크게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수아 1세는 샤토브리앙 백작은 지위를 높여 브르타뉴로 보냈고 그는 이에 대해서 감사히 여겼다고 합니다. 남편이 떠나있는 동안 프랑수아즈는 클로드 왕비의 시녀로 궁정에 남아있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즈는 프랑수아 1세의 공식 정부이긴 했지만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행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딱 한번 전쟁에 패배한 형제를 위해 프랑수아 1세에게 용서를 구했었던것이 다라고 합니다.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황제 카를 5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뒤 포로로 마드리드에 갔었습니다. 프랑수아는 프랑스로 돌아오는데 이때 그는 궁정에서 또다른 여성을 발견하게 되죠. 바로 안 드 피셀루 데일리 였었죠. 프랑수아즈는 그녀가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참지 못했고 결국 두 여성 사이에서는 국왕의 총애를 두고 경쟁이 벌어집니다만 패배한 쪽은 프랑수아즈였습니다.
인 드 피셀루 데일리
1528년 프랑수아즈는 남편의 성인 샤토 브리앙으로 돌아가면서 궁정에서 은퇴하게 되죠. 이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브르타뉴 총독직을 수행하고 있었죠. 하지만 프랑수아즈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는 여전이 편지가 자주 오갔으며 프랑수아 1세는 샤토브리앙 성을 자주 방문하고는 했었다고 합니다.
1537년 10월 프랑수아즈는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프랑수아즈 드 푸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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