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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6)앙투아네트 드 메녤레 : 샤를 7세의 정부

엘아라 2014. 5. 1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원래 정부들이 초상화가 잘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녜스 소렐은 초상화가 있어서 사촌인 앙투아네트도 있을줄 알았더니...=-=;;;;


정부들과 그 후손들...(6)앙투아네트 드 메녤레 : 샤를 7세의 정부



앙투아네트 드 메녤레

빌르키에 남작부인

샤를 7세의 정부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정부

Antoinette de Maignelais 

(1434–1474)


앙투아네트 드 메녤레는 장2세 드 메녤레와 그의 부인인 마리 드 주이(Marie de Jouy)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녜스 소렐의 어머니와 남매지간이었고 결국 앙투아네트 드 메녤레는 아녜스 소렐과 사촌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앙투아네트의 사촌이었던 아녜스 소렐


앙투아네트 드 메녤레 역시 사촌처럼 아름다웠으리라 추정되는데 왜냐면 사촌이 죽은후 그녀의 뒤를 이어 국왕 샤를 7세의 정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녀는 이전에 이미 궁정에 소개되었으며 국왕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것은 그녀가 아마도 아녜스 소렐의 사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듯합니다. 샤를 7세는 앙투아네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는데 앙투아네트가 14살이었던 1448년 샤를 7세는 그녀에게 오래도록 부르봉 공작가문과 메녤레 가문사이에 분쟁이 있었던 영지를 그녀가 상속받도록 조정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이미 사촌이 살아있었을때 국왕의 눈에 들었을 가능성을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왕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녜스 소렐이 사촌을 위해 힘을 써준것일수도 있을듯합니다.

앙투아네트는 아녜스 소렐의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고용되었을듯합니다. 그리고 사촌이 죽은 1450년 이후 그녀는 국왕의 공식 정부가 됩니다.



샤를 7세


앙투아네트 드 메녤레는 사촌이었던 아녜스 소렐과 달리 지적이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앙투아네트에게 매우 너그러웠는데 자신의 신하였던 빌르키에 남작 앙드레 드 빌르키에와 결혼시켰으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위해 영지와 연금등을 하사했으며 부부를 위해 게르슈 성(Château de la Guerche)을 지어주기도 했었죠.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결혼 4년만에 남편을 잃었다고 합니다.



게르슈 성

http://en.wikipedia.org/wiki/File:Chateau-de-la-guerche.jpg


1460년 샤를 7세가 죽은뒤 그의 정부였었던 앙투아네트는 궁정에서 은퇴햇었던듯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브르타뉴 궁정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앙투아네트는 샤를 7세의 사이나쁜 아들이었던 도팽에게 샤를 7세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고는 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때문에 루이 11세는 앙투아네트를 브르타뉴로 보냈었던듯합니다. 앙투아네트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데리고 브르타뉴로 갔었고 브르타뉴 공작이었던 프랑수아 2세는 앙투아네트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브르타뉴 공작 사이에서 모두 네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인 프랑수아 1세 드 아보구르는 아버지로부터 베르투 백작(프랑수아 2세가 물려받은 영지중 하나)의 지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브르탄뉴 공작 프랑수아 2세

안 드 브르타뉴의 아버지

(....안 드 브르타뉴가 참 인생이 기구하죠.. 결혼 무효가 된 막시밀리안 1세까지 치면 세번이나 결혼했고 두번은 다 프랑스 국왕이었으니 말입니다.)


앙투아네트는 브르타뉴 공작의 궁정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낭트에서 사망한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녀는 숄레의 대성당에 묻혔었다고 합니다.(...어디서 많이 들어본 지명이라고 했더니 방데 내전하던곳이 여기군요.-0-;;;)


자료출처

1.http://poudouvre.over-blog.com/article-antoinette-de-la-maignelais-maitresse-du-duc-de-bretagne-fran-ois-ii-122109988.html

2.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