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43) 테크의 메리 : 조지 5세의 왕비 (두번째)

엘아라 2014. 6. 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글을 왕창 써놔야하는데 미뤄놨더니 글들이 막 밀리네요..ㅠ.ㅠ


영국의 왕비들...(43) 테크의 메리 : 조지 5세의 왕비 (두번째)





테크의 메리

영국의 메리 왕비

Mary of Teck

 (Victoria Mary Augusta Louise Olga Pauline Claudine Agnes)

( 26 May 1867 – 24 March 1953) 

1893년



영국에서 행복하게 자라던 메리는 가족들과 함께 한동안 유럽대륙을 떠돌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부모가 경제관념이 좀 부족했었기 때문이었죠.

메리의 아버지인 테크 공작은 물려받을 지위 뿐만아니라 재산도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어머니인 캠브리지의 메리 애들라이드는 좀 경우가 달랐습니다. 팻 메리는 의회로부터 매년 오천파운드의 연금을 받았으며 어머니인 캠브리지 공작부인으로부터 사천파운드의 연금을 받았습니다. 거의 만파운드에 가까운 돈을 받았는데 이것은 매우 큰돈이기도 했었습니다. (섭정시대를 다룬 오만과 편견에서 주인공인 다시가 연수입이 만파운드라고 나오는데 나중에 리지가 다시랑 결혼한다고 하자 리지네 엄마가 그 돈때문에 완전 좋아 죽을려고 하죠.--;;;)

하지만 공작부부는 씀씀이가 매우 헤펐는데 공작부부는 자신들의 수입보다 훨씬더 많은 금액의 예술품들을 사모았었더고 합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가족들이 빚때문에 더이상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드는 영국에 살수 없게 되었고 빚에 쫒겨서 결국 가족들이 유럽대륙으로 가야했었다고 합니다. 메리의 가족들은 유럽의 여러 친척들을 전전하면서 살았었는데 한동안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메리의 어머니는 이 상황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그녀는 영국에서는 princess였지만 유럽에서는 겨우 호엔슈타인 백작부인 정도로 밖에 대접받지 못한것에 맘상했었죠.

메리는 비록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피렌체에서 여러가지 멋진 예술 작품들이나 건축물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부모의 상황은 메리를 훨씬더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을듯합니다. 어린 남동생들과 경제관념이 부족한 부모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듯합니다. 이런 경험은 메리가 훗날 영국 왕실의 경제에 대해서 매우 정확하게 파악해서 비용등을 절감할수 있게 만들기도 하죠. 

2년후인 1885년 영국으로 돌아온뒤 메리는 어머니의 비공식 개인비서겸 여러가지 일을 함께 하는 사이가 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어머니를 위해 메리가 많은 일을 처리했었다는 것을 의미할듯합니다. 또 메리는 이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와도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메리는 거의 평생을 이모와 매주 편지를 주고 받았었죠.



메리의 이모 

캠브리지의 아우구스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


영국으로 돌아온뒤에 아마도 메리는 여전히 영국 왕실 가족들과 가깝게 지냈을듯합니다. 웨일즈 공비가족들과는 잘 아는 사이였으며 빅토리아 여왕 역시 사촌과 그 가족들에 호의적이었으니까요. 아마도 빅토리아 여왕은 이때 메리가 강한 책임감을 가진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이것은 여왕이 메리를 자신의 손자 며느리가 되는데 찬성하는 계기가 됐을듯합니다.


메리는 1891년 12월 웨일즈 공의 장남이자 영국 왕위계승서열 제 2위였던 클라렌스와 애본대일 공작 앨버트 빅터(애칭 에디)와 약혼합니다. 이 약혼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가져온 약혼이었죠. 왜냐면 메리의 신분은 왕위계승자와 결혼하기에는 낮다고 여겨지는 신분이었기 때문이었죠. 어머니가 영국 공주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당시 왕족들은 귀천상혼한 가문에 대해서 상당히 낮게 평가했습니다. 일례로 훗날 메리의 이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는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와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의 결혼식에 대해서 "급조된 국왕의 아들과 사생아의 딸"이라고 언급할 정도였었죠. 조카인 메리가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임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에디와 약혼하는 방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에디와 메리의 약혼 사진

재미난것은 에디와 메리의 약혼사진에 메리의 이름이 메리가 아니라 빅토리아로 표기되는 것입니다. 첫번째이름이 빅토리아라서 다 빅토리아로 표기되더라구요.

하지만 더 재미난것은 조지5세와의 결혼사진이후 전부 메리라고 표기된다죠.

사진출처 : http://www.npg.org.uk/

(내셔널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 블로그용으로 허락을 받아서 다운로드한 사진임)


앨버트 빅터는 당시에 여러명의 여성과 혼담이나 스캔들이 이야기 되었었습니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사촌인 헤센의 알릭스였죠. 하지만 알릭스는 러시아로 시집가버렸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랑한 여성이 바로 헬렌 도를레앙으로 파리백작(오를레앙가문의 수장)의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렌은 프랑스 여성이자 가톨릭 교도라는 영국에서 가장 기피하는 왕비감이었었죠. 헬렌을 진심으로 사랑한 에디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의회를 설득시켜주겠다는 확답까지 받았지만 결국 파리백작과 교황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됩니다.(헬렌의 개종이 필수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 교황이 거부했던것이죠.)

결국 여러 다른 여성들과의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결국 서둘러 결혼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고 결국 메리가 선택됩니다. 낮은 신분에도 빅토리아 여왕은 메리와 장손과의 결혼을 흡족해했는데 여왕은 메리가 강인하고 의무에 매우 충실한 성품인것을 흡족해했었다고 합니다.



알릭스와 엘렌 도를레앙



하지만 메리는 이 키크고 잘생긴 왕자님과 결혼하지는 못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2.http://www.npg.org.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