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하하...덥군요..ㅠ.ㅠ
과수원이 일할땐 힘들지만 그래도 한낮빼고는 별로 안더웠거든요.
그런데 울동네는...ㅠ.ㅠ
영국의 왕비들...(42) 테크의 메리 : 조지 5세의 왕비 (첫번째)
테크의 메리
영국의 메리 왕비
Mary of Teck
(Victoria Mary Augusta Louise Olga Pauline Claudine Agnes)
( 26 May 1867 – 24 March 1953)
훗날 영국의 메리 왕비라고 알려지게되는 테크의 빅토리아 메리 어거스타 루이즈 올가 폴린 클라우딘 애그니스 공녀는 1867년 영국의 켄징턴궁에서 테크 공작 프란츠(프란시스)와 그의 부인인 캠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의 큰딸로 태어났습니다.
테크 공작인 프란츠는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인 알렉산더는 뷔르템베르크 공작가문의 후손으로 뷔르템베르크 국왕의 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인 클라우딘은 헝가리 출신의 귀족으로 통치 왕가의 후손이 아니었기에 결국 프란츠는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계승권이 없이 "호엔슈타인 백작"으로만 불렸었습니다. 그가 테크 공작이 될수 있었던것은 순전히 그의 아내이자 메리의 어머니인 캠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 때문이었습니다.
메리의 아버지
테크 공작 프란츠
캠브리지의 메리 애들라이드는 영국의 조지 3세의 아들인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와 그의 부인인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의 막내딸이었습니다. 영국의 공주였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자 하노버 국왕의 사촌이기도 했었기에 메리는 유럽의 대가문으로 시집갈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팻메리"라는 애칭으로 불릴정도로 메리는 매우 뚱뚱했고 수입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30살이 될때까지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죠. 게다가 영국 공주라는 높은 신분은 도리어 그녀가 짝을 찾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비슷한 신분의 결혼할만한 남자들을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죠. 이에 빅토리아 여왕은 홀로 늙어가는 사촌을 위해 적극적으로 신랑감을 찾아주게 됩니다. 그리고 찾은 남자가 바로 당시 테크 공(prince of teck)였던 프란츠였죠. 그는 오스트리아의 군인으로 살고 있었으며 국왕에 의해 "테크 공"칭호를 방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공주가 결혼하기에는 낮은 신분이었지만 결국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였던 팻메리에게는 적당한 상대였었습니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이 고른 남자니 인물은 확실히 잘 생긴...-0-;;;)
메리의 어머니
캠브리지의 메리 애들라이드
일반적으로 "팻메리"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프란츠는 영국 공주와 결혼한뒤 오스트리아 군에서 은퇴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메리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었습니다. (훗날 1차대전때 반 독일 감정이 강해졌을때 메리 왕비의 가문이 독일 출신이라고 공격받았는데 사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메리에게는 뭐랄까 섭섭한 감정이 들었을듯합니다.)
첫아이인 메리와 함께 있는 테크 공작 부부
빅토리아 여왕은 사촌은 팻메리의 가족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첫째딸인 메리가 태어나자 아이의 대모가 되어줍니다. 다른 대부모로는 여왕의 장남인 웨일즈공과 메리의 외할머니인 캠브리지 공작부인 아우구스타가 대부모였습니다. 재미난것은 메리는 원래 메리라는 이름이 아니라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쓸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애그니스 어거스타 빅토리아 루이즈 올가 폴린 클라우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려고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이에 대해서 반대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메리"라는 이름이 더 적합하다고 했으며 또 여왕이 대모가 되므로써 "빅토리아"가 맨 앞에 들어가게 되죠. 가족들에게는 애칭인 "메이(May)"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1867년의 빅토리아 여왕과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타 왕비(독일의 빌헬름 1세의 황후)
메리의 부모는 메리 뒤로 세명의 아들들을 더 낳았습니다. 메리는 세 남동생을 가진 장녀로 성장했는데 자라면서 남동생들사이를 잘 조정하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이런 성격은 훗날 그녀가 집안의 가장이나 마찬가지라는 느낌을 주게 되는 시초가 되기도 했을듯합니다. 어린시절 메리와 남동생들은 주로 비슷한 나이대였던 웨일즈공의 아이들과 함께 잘 어울렸습니다. 웨일즈 공비였던 알렉산드라는 덴마크 공주였지만, 알렉산드라의 어머니 루이세 왕비는 헤센-카셀가문 출신으로 메이의 외할머니인 캠브리지 공작부인의 조카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외국 공주였던 알렉산드라가 처음부터 캠브리지 공작 가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테크 가문 아이들은 웨일즈 공의 아이들과 어린시절 함께 어울릴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테크 가문 아이들은 신분이 좀 애매했고 이런 상황은 어린시절 웨일즈공의 아이들이 이들에 대해서 약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웨일즈 공의 자녀들
첫째였던 에디는 후에 메리의 첫번째 약혼자였고 둘째였던 조지는 메리의 남편이 되죠.
하지만 메리는 곧 영국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유럽의 여러곳을 전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녀의 부모의 낭비벽때문이었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역사이야기 > 영국의 왕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의 왕비들...(44) 테크의 메리 : 조지 5세의 왕비 (세번째) (0) | 2014.06.12 |
---|---|
영국의 왕비들...(43) 테크의 메리 : 조지 5세의 왕비 (두번째) (0) | 2014.06.05 |
영국의 왕비들...(41)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일곱번째) (0) | 2014.05.22 |
영국의 왕비들...(40)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에드워드 7세의 왕비(여섯번째) (0) | 2014.05.15 |
영국의 왕비들...(39)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에드워드 7세의 왕비(다섯번째) (0) | 2014.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