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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3) 아녜스 소렐 : 샤를 7세의 정부(첫번째)

엘아라 2014. 4.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정부들과 그 후손들...(3) 아녜스 소렐 : 샤를 7세의 정부(첫번째)




아녜스 소렐

Agnès Sorel 

(1422 – 9 February 1450)



아녜스 소렐은 기사였던 장 소렐(또는 장 소우Jean Soreau)와 그의 부인인 카트린 드 Maignelais (어떻게 읽냐고요.ㅠ.ㅠ)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그네스는 네명의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후에 샤를 7세의 신임을 얻는 신하가 됩니다.


중세의 다른 여성들처럼 아녜스 소렐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려진바는 극히 없습니다. 단지 그녀는 앙주 공작부인이자 시칠리 왕비이며 로렌 여공작이었던 이자벨 드 로렌(앙주의 마거릿의 어머니)의 시녀로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녜스 소렐이 받은 돈은 다른 귀족 여성들보다 작은 금액이었기에 높은 지위의 시녀는 아니었다고 추정합니다.



이자벨 드 로렌

그녀의 딸인 앙주의 마거릿은 잉글랜드의 헨리 6세의 왕비로 장미전쟁때 중요한 인물이기도 햇었습니다.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아녜스는 곧 궁정에서 이목을 집중하게 됩니다. 이사벨 드 로렌은 1443년 여름쯤에 샤를 7세와 만났는데 아마도 이때 이사벨의 시녀였던 아녜스 역시 궁정에서 샤를 7세를 만날을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아녜스 소렐은 1444년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딸인 마리를 낳았기에 결국 1444년 이전에 아녜스와 샤를 7세와의 접점은 이때쯤이었던 것이죠. 딸을 낳은뒤 아녜스 소렐은 이제 샤를 7세의 궁정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녀는 왕비였던 마리 당주의 시녀가 되죠. 마리 당주는 이사벨 드 로렌의 시누이이기도 했었습니다. 



마리 당주 

샤를 7세의 왕비


샤를 7세와 마리 당주는 1422년 결혼했으며, 둘사이에서는 모두 열네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샤를 7세가 아그네스를 정부로 둔 뒤에도 마리 당주와의 사이에서 역시 아이들이 더 태어났습니다. 마리 당주는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행사하려 들지도 않았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열네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전장이나 궁정을 옮겨다니는 남편을 따라 다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대신 자녀들을 키우면서 두어개의 성에 정착해서 살았었죠.( 아내들이 남편을 따라 전장에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아내이자 당대 잉글랜드 여성의 귀감으로 알려진 필리파 왕비는 임신중에도 남편을 따라 전장에 갔었습니다. 임신한 그녀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칼레의 시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했던 이야기는 유명하죠.) 



샤를 7세와 마리 당주


이때문에 아녜스 소렐은 자주 왕비가 없는 국왕 곁에 머물면서 국왕의 정부로써 궁정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에 대해서 동시대 인물들은 " Dame de beauté,"라고 부를 정도였었으며 국왕 스스로도 아녜스 소렐을 왕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칭송하죠.

사실 샤를 7세에게는 아그네스 소렐 말고도 다른 정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존재는 아녜스 소렐의 역할에 미치지도 못했고 중요성도 떨어지게 됩니다. 왕비를 대신해서 궁정을 주도하는 여성이었으며 국왕의 총애를 받았기에 수많은 보석과 화려한 의상들을 받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그녀가 궁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죠. 이때문에 몇몇 당대 종교적 관점에서는 정부와의 죄악에 빠진 국왕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샤를 7세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http://www.umt.edu/art/sites/default/files/documents/graduate/Lemperle_handy%20MA%20Art%20History.pdf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