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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78) 마리 발레리 :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딸 (두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 발레리 여대공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Archduchess Marie Valerie of Austria
(22 April 1868 – 6 September 1924)
1903년
마리 발레리는 18살이되던 1886년 무도회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프란츠 살바토르(프란체스코 살바토레) 대공으로 합스부르크가문의 분가중 하나였던 토스카나 대공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마리 발레리는 그에게 반했고 그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많은 이들이 프란츠 살바토르가 마리 발레리에게 적합한 남편감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프란츠 살바토르는 합스부르크가문 출신으로 "대공(Archduke)"라고 불리긴 했지만 그는 토스카나 대공의 손자였을뿐 가문을 상속할만한 서열이 아니었습니다. 또 토스카나 대공령은 이미 1860년에 대공령이 폐지가 되었기에 프란츠 살바토르는 말 그대로 "이름뿐인 대공"이었습니다. 이런 남자에게 황제의 딸인 마리 발레리는 과분한 상대였죠.
프란츠 살바토르
1890년경
게다가 마리 발레리에게는 다른 혼담 상대들이 있었습니다. 언니인 기젤라는 적당한 신랑감을 찾을수 없었지만 10살정도 어린 마리 발레리는 사정이 달랐죠. 많은 가톨릭 왕위계승자들이 마리 발레리와 비슷한 나이대로 혼담이 오갈만했습니다. 마리 발레리의 남편감으로 여겨졌던 인물들은 작센의 왕태자(후에 작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3세)나 브라간사 공작(후에 포르투갈의 카를로스1세) 등이 후보였었죠. 또 바이에른의 알폰소 왕자(바이에른의 루드비히 1세의 손자이자 에스파냐의 이사벨 2세의 외손자)도 후보중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왕위계승자이거나 통치 왕가의 왕족이었기에 프란츠 살바토르보다 훨씬 더 좋은 상대로 여겨졌었습니다.
하지만 마리 발레리는 프란츠 살바토르와 결혼하길 원했으며, 어머니 시씨황후는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어떤 신분이든 상관하지 않고 결혼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황제의 허락을 받은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죠. 결국 마리 발레리는 1890년 프란츠 살바토르와 결혼합니다. 마리 발레리가 결혼하기전 마리 발레리의 언니인 기젤라나 오빠인 루돌프는 매우 불만을 품었었고 한동안 동생과 소원했었다고 합니다만, 결국 둘은 동생과 화해했으며 결혼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토르
결혼전후쯤(분위기로 봐선 약혼사진쯤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토르는 하오스트리아(Lower Austria)의 발지성(Scholss Wallsee)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마리 발레리는 지역 주민들과 잘 어울렸으며 황제의 딸로 여러가지 사회사업등을 합니다. 1900년에는 지역 적십자사를 세우는데 후원하기도 했으며 병원을 세우거나 자선사업등을 하죠. 이때문에 이 지역의 주민들은 마리 발레리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리 발레리의 삶에서 가족의 불행은 피할수 없는 것이었죠. 1889년에는 오빠인 루돌프가 자살을 했으며, 1898년에는 어머니 시씨황후가 암살당했습니다. 마리 발레리는 오빠와 어머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언니 기젤라와 함께 사랑하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의 곁에서 힘이 되어줬었습니다.
언니 기젤라와 함께 있는 마리 발레리
1890년경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토르 사이에서는 모두 10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마리 발레리는 아이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썼는데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개혁적 교육가였던 엘사 쾰러를 고용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토르의 결혼생활은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다른 많은 경우처럼 불행해지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프란츠 살바토르가 수많은 여성들과 연애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죠. 프란츠 살바토르의 애인들중 가장 유명한 여성은 "히틀러의 왕녀 스파이"라고 알려져있던 스테파니 폰 호엔로에입니다. 유대인 출신의 스테파니는 결혼으로 호엔로에 공비가 되는데 결혼전에 프란츠 살바토르와의 관계에서 아들인 프란츠 요제프를 낳았었습니다. 마리 발레리는 죽기 전에 남편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마리 발레리가 불면에 시달리도록 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마리 발레리는 1차대전이 끝날때쯤 제국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봐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의 권리를 포기했었죠. 대신에 살고 있던 집과 재산을 유지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로트
그리고 둘의 자녀들
마리 발레리는 1924년 살던 발지 성에서 림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지역에서 매우 인기 있는 사람이었기에 장례식때 수천명의 사람들이 마리 발레리의 관을 따랐다고 합니다. 다뉴브강에 있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를 잇는 "마리 발레리 다리"는 마리 발레리 여대공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것이라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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