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76) 기젤라 : 프란츠 요제프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4. 3. 2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76) 기젤라 : 프란츠 요제프의 딸(두번째)


 

 

오스트리아의 기젤라 여대공

바이에른의 왕자비

Gisela Louise Marie,

Gisela Louise Marie Erzherzogin von Österreich 

Princess Imperial and Archduchess of Austria, Princess of Hungary and Bohemia,

Princess of Bavaria 

(12 July 1856 – 27 July 1932) 

 


기젤라는 1873년 4월 20일  만 17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빈에서 27살의 바이에른의 레오폴트와 결혼합니다.바이에른에서 기젤라는 매우 환영받았습니다. 아마도 기젤라의 어머니는 바이에른 출신으로 기젤라도 가톨릭을 믿었고, 황제의 딸이었던 점이 바이에른 사람들에게 크게 와 닿았을듯합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살던 집이 있던 거리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개명되었었죠.기젤라의 집은 그녀의 가족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긴 했습니다만, 어머니인 시씨 황후는 딸의 집을 찾아가지 않고 호텔에 머물렀었다고 합니다. 


바이에른에서 기젤라는 자선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을 돌봤으며 특히 청각과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 매우 깊이 관여했었죠. (아마 이것은 외삼촌이 유명한 안과의사인것과 관계있을듯합니다.) 또 1차대전이 일어났을때 그녀의 남편이 동부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하는동안 자신의 집을 개방해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위한 병원으로 썼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있는 기젤라

1차대전이 끝나고 바이에른 역시 다른 나라들처럼 공화국이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레오폴트는 동부전선에서 오래도록 지체하고 있었으며 기젤라 역시 남편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1918년 혁명으로 바이에른 왕실 가족들이 뮌헨을 떠났을때 기젤라는 뮌헨에 남았는데 아마도 남편인 레오폴트를 기다렷었던듯합니다. 그리고 1919년 남편인 레오폴트가 돌아오죠. 이때 기젤라와 레오폴트는 아마도 선거를 할수 있었던듯합니다만 결국 그들 역시 뮌헨을 떠나야했습니다. 기젤라와 가족들이 이슐로 갔을때 사람들이 퇴역군인등이 둘에게 적대적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둘은 뮌헨으로 돌아갔으며 늘 다른 이들을 도왔었던 기젤라는 다시 뮌헨 사람들의 호의를 얻었다고 합니다.

 

뮌헨으로 돌아온 기젤라와 그녀의 남편은 평범한 삶을 살았으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둘은 1923년 금혼식을 지내기도 했었죠. 기젤라의 남편은 1930년 사망했으며, 남편이 죽은 2년뒤 기젤라도 사망했으며 남편 곁에 묻혔습니다.

 

 

기젤라와 레오폴트

기젤라와 레오폴트 사이에서는 모두 네명의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첫째는 시씨 황후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트 마리였는데 그녀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둘의 결혼은 비밀이었는데 둘은 결혼하지 못할바에는 동반자살하겠다고 위협했었습니다. 엘리자베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와 할아버지인 루이트폴트는 이에 매우 화를 냈지만, 기젤라와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엘리자베트의 행복을 위해서 중재에 나섰고 결국 가족들은 다시 엘리자베트를 만났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아우구스테로 친할머니의 이름을 땄습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가문의 헝가리쪽 분가쪽인 요제프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했습니다.

셋째는 아들인 게오르그로 테센쪽 분가 출신인 이사벨라 여대공과 결혼했습니다만, 신혼여행에서 헤어졌으며 결혼을 무효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가톨릭 사제가 됐습니다.

막내는 아들인 콘라드로 사보이-제노바의 보나 이사벨라와 결혼했었습니다.

 

 

레오폴트와 기젤라의 금혼식 때

부부뒤쪽으로 보이는 세명이 자녀들인듯합니다. 장남인 게오르그는 주교 왼쪽 뒤에 있는 신부로 표현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