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The White Queen] 웨일즈 공 윈체스터의 에드워드

엘아라 2014. 1.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The White Queen] 웨일즈 공 윈체스터의 에드워드 





윈체스터의 에드워드

Edward of Westminster 

(13 October 1453 – 4 May 1471),

18세기 그림


윈체스터의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6세와 그의 부인인 앙주의 마거릿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에드워드가 태어났을때 헨리 6세의 정신 상태는 이미 나빠지기 시작했었기에, 그가 헨리 6세의 아들이 아닐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었으며 헨리 6세 스스로도 에드워드의 출생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고 합니다. 에드워드는 1454년 잉글랜드 왕위계승자에게 부여되는 칭호인 "웨일즈 공"칭호를 부여받습니다.



에드워드의 부모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


1460년 헨리 6세는 요크가문쪽 사람들에게 붙잡혔으며 요크 공작인 리처드는 헨리 6세와 의회에게서 "왕위계승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은 에드워드의 계승권을 배제하는 것으로 에드워드의 어머니인 마거릿은 이를 용납할수 없었죠. 그녀는 일곱살난 아들과 함께 북쪽으로 가서 병력을 모읍니다. 그리고 다시 요크 가문과 전투를 했고 남편을 되찾았으며 승리를 얻게 되죠. 

하지만 1461년 요크 공작의 후계자인 에드워드가 승리를 거뒀고 웨일즈 공과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로 망명해야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에드워드는 다시 왕위를 되찾으려 했으며 여기에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가담합니다. 루이 11세는 요크가문과 친한 부르고뉴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서였고 워릭 백작은 엘리자베스 우드빌때문에 에드워드 4세와 사이가 틀어졌었죠. 둘은 웨일즈 공의 동맹이 되는데 루이 11세는 자신의 후계자인 샤를의 대부로 웨일즈 공을 지목했으며, 워릭 백작은 자신의 막내딸인 앤 네빌을 그와 결혼시킵니다.


워릭 백작이 먼저 돌아가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 뒤에 웨일즈공과 그의 어머니인 앙주의 마거릿이 잉글랜드로 돌아가죠. 하지만 해가 바뀐 1471년 요크가문의 반격은 성공합니다. 워릭백작이 이전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마지막으로 튜크스베리 전투에 앙주의 마거릿과 웨일즈 공 에드워드가 참전합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랭카스터 가문은 패배하게 됩니다. 웨일즈공의 죽음은 정확하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개정도의 이야기로 나뉩니다. 먼저 그가 전장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를 죽인 인물이 바로 글로스터 공작인 리처드(후에 리처드 3세)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가 포로로 잡혔는데 웨일즈 공은 전투가 끝난후 에드워드 4세와 글로스터 공작과 그 신하들 앞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4세가 왜 자신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냐는 말에 웨일즈공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려 했다고 했으며 그의 건틀렛을 국왕의 얼굴에 던졌다고 합니다. 이런 위협적 행동에 국왕을 보호하려던 신하들이 에드워드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4세 앞에서의 웨일즈공 에드워드


죽은후 에드워드는 튜크스베리 성당에 묻혔습니다. 이때가 그가 열일곱살때였죠. 그의 아버지인 헨리 6세는 이전에 살해당했고 그의 어머니인 앙주의 마거릿은 포로로 있다가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보퍼트 가문의 직계 남성들마저 모두 살해당했기에 랭카스터 가문의 직계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가장 가까운 혈족이었던 헨리 튜더가 랭카스터 가문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게 됐는데,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들은 그의 숙부인 재스퍼 튜더는 이 소식을 듣고 조카를 망명시켰다고 합니다. 에드워드의 아내인 앤 네빌은 후에 글로스터 공작인 리처드와 재혼했으며 그가 국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