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65)마리아 루도비카 : 황제 프란츠 2세의 딸 (다섯번째)

엘아라 2013. 12. 2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65)마리아 루도비카 : 황제 프란츠 2세의 딸 (다섯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루도비카 여대공

프랑스의 마리 루이즈 황후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자 여공작

Marie Louise of Austria

(Maria Ludovica Leopoldina Franziska Therese Josepha Lucia von Habsburg-Lothringen)

(12 December 1791 – 17 December 1847) 



1816년 마리 루이즈는 이제 파르마 여공작으로 파르마로 갑니다. 물론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연인이 된 나이페르크 백작이 함께 동행하고 있었죠. 파르마의 통치에 대한 걱정은 별로 할 필요가 없었던것이 파르마 주변의 인근 국가들의 군주들이 모두 마리 루이즈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었죠.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았고,토스카나 대공은 마리 루이즈의 숙부었죠. 모데나 공작은 마리 루이즈의 아버지와 사촌었죠. 또 양시칠리의 국왕은 마리 루이즈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파르마에서 마리 루이즈는 이제 이탈리아식 이름인 마리아 루이자라는 이름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파르마에서 거의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파르마의 통치는 오스트리아의 명령을 받은 나이페르크 백작이 담당했으며 마리아 루이자는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보내죠. 그녀는 주로 예술을 후원하면서 파르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 루이자는 가끔씩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는데 주로 복지 문제등에 관계된 것이었죠. 마리아 루이자는 파르마에서 삶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그녀는 나폴레옹과 지내던 시기의 혼란함에 비해서 파르마에서는 너무나 평온한 삶을 살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루이자 

파르마 여공작

1830년대


마리아 루이사는 이전에 프랑스에서 더이상 아이를 낳을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1817년 5월 딸인 알베르틴을 낳습니다. 그리고 두명의 아이를 더 낳게 되죠. 이 아이들은 연인인 나이페르크 백작의 아이들이었습니다만 마리아 루이사는 아직까지 나폴레옹과 부부였고 아이들은 법적으로 사생아였습니다. 이때문에 마리아 루이사는 아이들을 궁에서 키울수 없었고 또 아이들이 태어난 사실이 빈과 파르마에 알려지게 되면서 고통받게 되죠.

마리아 루이사는 빈에 남겨두고 온 큰아들의 운명을 걱정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아들에게 영지를 하사해주길 바라죠. 마리아 루이사의 아버지는 외손자에게 영지와 라이히슈타트 공작 칭호를 줍니다. 마리아 루이사는 가끔 빈으로 가서 아들을 만납니다만 둘은 함께 살수는 없었죠.


마리아 루이사와 나이페르크 백작의 딸

알베르티나 마리 폰 몬테누오보


1821년 나폴레옹이 사망하면서 마리아 루이사는 나이페르크 백작과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아이들은 어머니의 지위를 이어받을수 없었습니다만 이제 아이들을 궁전으로 데려와서 살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 루이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어린시절과 비슷한 환경에서 교육받고 자라도록 하죠.

마리 루이즈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는 나이페르크 백작이 자신의 새아버지이며 어머니가 이부동생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한동안 어머니와의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페이나르크와의 결혼은 비밀 결혼이었으며 빈에서는 그 결혼이 공표되길 바라지 않았고 아이들에 대해서도 밝혀지지 않길 바랍니다.이때문에 1829년 나이페르크 백작이 심장 문제로 사망했을때 빈에서는 마리아 루이사가 상복을 입는것을 금지했었습니다. 또 나이페르크 백작은 유언으로 아이들을 마리아 루이사가 입양하길 바랫지만, 빈의 궁정에서는 아이들을 인지하는것이나 입양하는 것 모두 거부했습니다.



빌헬름 알브레히트 폰 몬테누오보

마리-루이즈와 나이페르크 백자의 아들

그는 오스트리아 군으로 복무했으며 그의 아들인 알프레트 폰 몬테누오보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시절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는데 그는 특히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정적으로 그의 귀천상혼한 아내인 호엔베르크 공작부인과 그 자녀들에 대해서 푸대접을 한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1831년 이탈리아에서도 혁명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파르마 역시 이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리아 루이사는 잠시 파르마를 떠났지만 곧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르마를 장악했고  반란은 진압되죠.  하지만 마리아 루이사는 반란을 선동한 사람들을 사면해줬다고 합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장남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1828년부터 군인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는 허약하지만 훤칠한 키에 침울한 분위기의 매우 잘 생긴 인물로 성장했었죠. 그의 처지에 대해서 궁정내에서 동정하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여기에는 황제인 프란츠 1세와 공작의 숙모였던 바이에른의 조피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1832년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빈에서는 정치적 문제때문에 마리아 루이사에게 아들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녀가 아들의 상태를 알게 되자마자 마리아 루이사는 아들에게 달려갑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장남인 나폴레옹 2세는 1832년 7월 22일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습니다.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아들

나폴레옹 2세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


메테르니히는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뒤에도 여러명의 관리를 보내 파르마를 통치하게 했습니다. 1833년에는 샤를 르네 드 봉벨이라는 인물을 파견하게 되죠. 그리고 그는 파르마에 도착한지 육개월후인 1834년 2월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 역시 귀천상혼이자 비밀이었는데 이번 결혼은 앞선 결혼과 달리 아마도 정치적 의도가 강했었을리라 추정합니다. 마리아 루이사와 봉벨 후작은 둘다 나이가 지긋했으며 이런 둘이 결혼한 이유는 그가 파르마를 통치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마리아 루이사와의 결혼 상태로 있는 편이 편했기 때문일듯합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남편

봉벨 후작


마리아 루이사는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평온하게 사는 삶에 크게 만족합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남은 두아이들은 마리아 루이사가 살아있을때 모두 결혼했죠. 1847년 말 마리아 루이사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47년 12월 사망하죠. 그녀의 두 자녀들은 어머니로부터 정식으로 상속을 받을수 없으며 단지 일정금액의 유산과 어머니 개인 소지품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시신은 파르마에서 빈으로 보내졌으며 그녀는 황실 영묘에 안장되었습니다.



마리아 루이자

파르마 여공작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