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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Queen]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 헨리 7세의 어머니

엘아라 2013. 11. 2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0-;;; 

했던사람안할려고 했는데 ........

읽은 글이 없어서 또 우려먹습니다.-0-;;


늘 그렇듯이 이전글과 미묘하게 다를 예정입니다.-0-;;;;


[The White Queen]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 헨리 7세의 어머니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리치먼드와 더비의 백작부인

헨리 7세의 어머니

Margaret Beaufort 

Countess of Richmond and Derby 

(31 May 1443 – 29 June 1509) 



헨리 7세의 어머니였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1443년경 블랫소성에서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와 그의 부인인 블랫소의 마거릿 보챔프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아버지는 1대 서머셋 공작인 존 보퍼트로 그는 랭카스터 공작 존과 그의 세번째 부인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장남인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의 둘째아들이자 후계자였습니다. 마거릿의 어머니는 마거릿 보챔프인데 그녀는 블랫소 성이 있던 베드포드셔 인근의 토지를 상속받은 상속녀였습니다. (하지만 워윅백작가문인 보챔프 가문이랑은 좀 다른 가문인듯합니다.) 마거릿의 어머니인 머거릿 보챔프는 서머셋 공작과 결혼했을때 두번째 결혼으로 첫번째 결혼에서 일곱명의 아이들을 뒀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남편이 죽은뒤 다시 재혼했었죠.


마거릿의 아버지인 존 보퍼트는 1444년 프랑스에서 사망했으며 그는 죽기전 국왕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이의 후견과 결혼에 대해서 아내에게 결정권을 주라고 국왕과 협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존 보퍼트가 죽은뒤 국왕은 존 보퍼트와의 협상을 깨고, 마거릿을 1대 서퍽공작이었던 윌리엄 드 라 폴을 후견인으로 내세웁니다. 비록 후견인이 정해졌지만 마거릿은 당시 아버지를 잃은 귀족 자녀들과 달리 어머니가 키웠다고 합니다. (후견인이 중요한 이유는 재산권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이게 잉글랜드 사에 보면 좀 복잡한 문제라서 말입니다. 저렇게 남편이나 아들 오빠 아버지가 없는 상속녀의 경우 후견인이나 국왕의 보호아래 있어야했고 그들이 이 상속녀에게 누군가가 생길때까지 재산권을 대리한다고 하더라구요.)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상속녀였으며 랭카스터 가문의 분가인 보퍼트 가문의 후손이었기에 결혼에 대한 그녀의 가치는 중요해집니다. 마거릿의 후견인이었던 윌리엄 드 라 폴은 자신의 아들인 존 드 라 폴을 마거릿과 결혼시킵니다. 이때 마거릿은 3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에 이 결혼은 무효로 선언되었고 마거릿 스스로도 존 드 라 폴을 평생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의 문장



이후 마거릿은 헨리 6세의 명으로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인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결혼 다음해 리치먼드 백작은 사망했죠. 이때 마거릿은 열세살로 임신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녀를 돌본이가 시동생이었던 펌브로크 백작 재스퍼 튜더였죠. 마거릿은 아이를 낳다가 거의 죽을뻔했는데 아이를 낳기에 너무 어렸던것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거릿은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죠.이 때문에 백부와 잉글랜드 왕들의 이름인 "헨리"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이 아들과 늘 가까운 사이로 지내려합니다.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의 문장


마거릿은 1458년 재혼을 하게 됩니다. 재혼 상대는 버킹엄 공작의 아들이었던 헨리 스탯포드였습니다. 마거릿이 이렇게 빨리 재혼할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상속녀였기때문입니다. 여성의 독자적 활동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 시기였기에 마거릿은 자신과 미성년인 아들을 보호해줄 남편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녀는 당시에는 특이하게 재혼할때도 아들인 헨리와 떨어지지 않고 아들을 데려가서 양육했습니다. 헨리 스탯포드와의 결혼생활은 마거릿에게 매우 안정감을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오래 데리고 있을수 없었는데 1461년 요크가문이 득세하자 랭카스터 가문의 후계자중 한명인 그녀의 아들은 웨일즈에 있는 숙부와 함께 지내야만 했었죠.


1471년 헨리 스탯포드가 사망하자 마거릿은 다시 결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랭카스터 가문 출신의 대 영주였으며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랭카스터 가문의 가장 강력한 계승후보자였었죠. 이런 그녀가 요크 가문 국왕 치하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직 연줄이 필요했으며 이때문에 결혼한 인물이 바로 토마스 스탠리였습니다. 그와 결혼한뒤 마거릿은 궁정으로 돌아갈수 있었으며 에드워드 4세의 딸들중 한명의 대모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스탠리는 리처드 3세의 충직한 신하였었기에 리처드 3세시기에도 궁정에서 일을 하게 되죠.



토마스 스탠리

1대 더비 백작


하지만 마거릿은 자신의 아들을 위한 계획을 잊지 않습니다. 그녀는 리처드 3세에 대한 미묘한 기류를 읽었으며 여러 사람들을 포섭합니다. 제일 먼저 포섭한 사람이 바로 남편인 토마스 스탠리였죠. 그뒤로 버킹엄 공작등을 포섭했으며 성소에 도망가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도 거래를 합니다. 그녀의 아들과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기로 했었죠. 하지만 버킹엄 공작의 반란은 실패했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성소를 나와 유폐당했으며 딸들은 리처드의 궁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거릿 역시 사권박탈을 당해서 집에 유폐되었죠. 


곧 마거릿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으며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마거릿의 남편인 토마스 스탠리는 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후에 헨리는 양아버지를 위해 "더비 백작"칭호를 부여했죠. 이때문에 마거릿 역시 "리치먼드와 더비의 백작부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러나 마거릿은 마지막 남편과 함께 지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1499년 남편의 허락을 받고 수녀로써의 서원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흔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남편과 떨어져 지냈는데 토마스 스탠리는 아내를 정기적으로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스탠리가 사망한후인 1504년 다시 한번 서원을 했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리치먼드와 더비의 백작부인

The King's Mother


마거릿은 국왕의 어머니이자 가장 큰 조력자중 한명으로 궁정에서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아들인 헨리 7세는 어머니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이었으며 교육을 잘 받은 어머니를 경제적,정치적 지원을 해줬었죠. 마거릿은 1460년대에 Margaret Richmond라는 서명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99년 이후에는 Margaret R이라는 서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죠. R은 Regina를 의미하는것으로 아들이 그녀의 정당한 계승권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 역시 궁정에서 동등한 대접을 받았으리라 추정할수 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리치먼드와 더비의 백작부인이자 "the King's Mother""은 1509년 아들 헨리 7세가 죽은 두달후 사망합니다. 그리고  레이디 마거릿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동쪽끝에 있는 수녀원 성당인 Henry VII Lady Chapel에 묻혔습니다.


드라마 The White Queen에서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레이디 마거릿은 여기서 시동생인 재스퍼 튜더를 사랑했지만 결혼할수 없었던 인물로 나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만 충실하고 다른 남편들과의 관계는 그냥 표면적일 뿐으로 나오죠.

그녀는 늘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국왕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 계시를 받게 됩니다.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아들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I'm Queen Regina"라고 외치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http://www.bbc.co.uk/programmes/p018sxqp/profiles/margaret-beauf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