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마리 앙투아네트 마지막이군요.
ㅎㅎㅎ 사실 지금 왼손 엄지쪽 인대가 늘어났거든요.
타자치는데는 지장이 없긴한데 이게 무거운걸 못 들더랩니다. 병뚜껑도 못따고 말입니다. 그래도 처음보다 좋아졌는데 처음에는 주먹도 못쥐고, 단추도 못 잠그겠더라구요. --;;;
의사가 2주만 깁스하면 된다고 꼬셨는데,타자치는데 불편할것같아서 그냥 쿨하게 나왔다죠.
이러면 잘 안 낫는다고 하긴 하던데..집에서 시간 날때마다 압박붕대로 감아놓고 있어요.
예전에 붕대 감는법을 배워둔것을 이때 써먹는군요..-0-;;;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7)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다섯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여대공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Marie Antoinette
Maria Antonia Josepha (or Josephina) Johanna
(2 November 1755 – 16 October 1793)
1791년
1789년 7월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이죠. 7월 11일 네케르의 사임이후 7월 14일 드디어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인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문에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 7월 14일이라고 합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후 왕족들과 귀족들은 매우 불안해했으며 서둘러 도망을 갑니다. 루이 16세의 동생이었던 아르투아 백작 가족들은 몇몇의 궁정 조신들과 함께 프랑스를 떠났고 여기에는 국왕과 왕비의 총애를 받았던 폴리냑 공작부인도 포함되어있었죠. 가장 큰 위험에 처해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인 국왕과 함께 프랑스에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상황은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죠.
이제 헌법을 제정해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려하고 있었습니다만, 여러가지 정치적 문제가 작용합니다. 결국 10월 프랑스에 남아있던 프랑스 왕실 가족들 모두 베르사유에서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왕실 가족들은 튈르리 궁전에 가택 연금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몇몇 공식행사를 제외하고는 주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죠.
마리 앙투아네트의 두 아이
마리 테레즈와 루이-샤를
여기 쁘티 트리아농인듯..-0-;;;
그러고 보니 예전에 봤었던 그림이군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대중의 눈을 피하려했지만,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대중들의 비난의 화살은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마리 앙투아네트의 적들은 마리를 흑색선전에 이용하게 됩니다. 그들은 비가 부정을 저질렀으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선전물 뿌렸고, 이런 비방은 점차 커져서 나중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근친상간이라는 혐의까지 씌우는 계기가 된듯 합니다.
이러는 동안 프랑스의 왕권은 점차 약해져갔으며 군주제 자체도 위협받게 되죠.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아들이 여전히 왕국인 프랑스의 통치자가 되길 바랬다고 합니다.
프랑스 왕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곁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국왕의 결단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국왕으로써 프랑스를 떠나는것을 주저했으며 또 여러가지 문제점 때문에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왕실 가족의 탈출은 바렌느에서 발각되었고 군중들에 의해서 다시 파리로 돌려보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치명적 사건으로 나라를 버리고 떠나려 했던 국왕 부부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되죠.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의 군주제를 끝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791년 바렌느에서 국왕 가족의 체포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오빠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폴트 2세에게 기대를 걸게 됩니다. 국왕 부부를 구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이 프랑스를 향해 가게 됩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프랑스는 이들을 향해 먼저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바로 프랑스 혁명전쟁의 시작이었죠.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입장은 더욱더 난처하게 됩니다. 이제 그녀는 "적국 출신의 왕비"였고 프랑스 내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었습니다.
루이 16세는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몇몇 사안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했었습니다. 이것은 급진적 사람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으며 결국 1792년 8월 무장한 일단의 무리가 튈르리 궁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왕당파와 스위스 용병들이 그들과 전투를 했고 국왕 가족들은 간신히 도망쳐야했습니다
튈르리 궁전에서 성난 군중에 둘러쌓여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녀들 그리고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
튈르리 궁전 습격사건이후 왕실 가족들은 탕플에 억류당하게 되죠. 혁명은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는데 1792년 9월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친이었던 랑발 공비가 군중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녀의 시신은 잔혹하게 훼손되었는데 마리는 이런 모습은 보지는 못했지만, 친한 친구의 비극적 죽음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을것입니다.
결국 1792년 9월 21일 프랑스에서는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이제 프랑스는 공화국이 됩니다. 그리고 왕족들은 "카페"라는 성으로 불렸으며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떨어져 갇히게 됩니다.그리고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길로틴에서 처형당합니다.
루이 16세
1790년대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남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죽음을 전해듣고 먹거나 움직이려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졌는데 결핵에 걸렸으며 자주 하혈을 했는데 아마도 자궁암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과는 조금 다른 처지였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이긴 했지만 오스트리아 여대공으로 오스트리아와의 협상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죠. 하지만 1793년경의 프랑스는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기로 공안위원회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들과 떨어져 갇혔습니다. 몇몇 구출시도가 있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합니다.
남편의 상복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가슴에 있는 카메오는 아이들이고 손에 든것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전기라고 합니다.
오른쪽에는 남편 루이 16세의 흉상이 있습니다.
10월 14일 왕비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오스트리아로 자금을 빼돌렸으며, 오를레앙 공작의 살해하려했고 스위스 용병들의 죽음을 방조했으며, 아들과 근친상간했다는 죄목이 붙여지게 됩니다. 마리의 둘째아들인 루이 샤를은 어머니에 대한 성적 학대를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죄목에 대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강하게 부정합니다. 이런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재판장에 있었던 많은 여성들이 동조했는데, 이들 중에는 왕비를 싫어했던 이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안 위원회는 이미 판결을 내려놓은 상황이었죠. 마리 앙투아네트는 길로틴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형을 선고 받은뒤 감옥으로 돌아가서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만 이 편지는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탕플에서의 마리 앙투아네트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를 자르고 흰 옷을 입은뒤 마차로 콩코르드 광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길로틴형으로 처형됩니다.
마리가 죽은 다음해인 1794년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 역시 길로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아들인 루이 역시 감옥에서 사망합니다. 딸인 마리 테레즈는 포로교환을 통해 외가인 오스트리아로 갔으며 이후 그녀는 사촌인 앙굴렘 공작과 결혼합니다만 후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시신은 왕정이 복고 된뒤 다시 발굴되었으며 생드니 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생드니에 있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념상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Louis_XVI_et_Marie-Antoinette.jpg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전과 죽은후에 매우 큰 오명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상당수는 혁명기의 그녀에 대한 흑색선전인 경우가 많았죠. 최근에서야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긴 합니다만,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무개념 사치의 왕비"라는 개념이 먼저 인식되는듯 합니다.
늘 생각하지만 혁명은 "왕비나 황후"개인의 실정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겹쳐지면서 일어나는 것이죠.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난받기 쉬운 "오스트리아 여자(외국인 왕비)"였기에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고 오래도록 지속된것이 아닐까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엘리자베트 비제-르블룅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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