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줄여야하는데 줄어들지가 않아요...어흑..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6)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네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여대공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Marie Antoinette
Maria Antonia Josepha (or Josephina) Johanna
(2 November 1755 – 16 October 1793)
1783년
엘리자베트 비제-르 블룅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어머니가 되었으며 후계자의 어머니였었죠. 하지만 그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정치적 권력을 준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람들이 생각한것보다 많이 약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도 변화가 생깁니다. 그녀는 이제 어머니로써 아이들을 돌보는데 집중했으며, 이전의 화려한 파티나 과도한 장식의 옷들에 대해서 별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때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국식의 모슬린으로 된 옷을 입는것을 즐겼는데 비제-르 블룅의 그림 중 하나에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 왕비로써는 적합하지 않는 복식이라고 여겨졌었으며 궁정에서는 이런 왕비의 모습에 "왕비가 속옷만 입고 그림을 그렸다"라고 할 정도였었습니다. 마리는 아이들 역시 소박한 차림새를 더 즐겼다고 합니다.
모슬린 드레스 차림의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엘리자베트 비제-르블룅
위의 초상화랑 구도가 똑같죠.
참고로 이 초상화는 슐로스 볼프르가르텐에 있다고 합니다. 슐로스 볼프스가르텐은 원래 헤센 대공가의 사냥 별장으로 올해까지 헤센의 란트그라프(헤센 가문의 수장) 였던 모리츠의 거처였습니다. 이분 올해 돌아가셨던가 그렇습니다.
이런 마리 앙투아네트의 개인적 삶은 곧 불안정하게 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프랑스 재정 문제가 매우 복잡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루이 16세 당시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왕실의 사치가 문제가 아니었었죠. 루이 14세때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했으며 대규모 건축을 했었기에 프랑스의 재정 상태는 늘 문제였었습니다. 프랑스의 재정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것은 바로 군대였는데, 전시에는 더욱더 재정을 많이 잠식했었죠.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이것은 재정에 결정적 타격을 주게 되죠.
미국 독립전쟁중 요크타운 전투에서 항복을 하는 영국 사령관
왼쪽에 있는 군인들은 프랑스군이고 오른쪽이 미국군입니다.
이기간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러가지 문제로 점차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때 베르사유 인근의 개인 농가와 농장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중들이 보기에 재정상태가 나빠지고 있었음에도 왕비가 사치를 한다고 볼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마리 앙투아네트가 영국식 패션에 관심을 가진것 역시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당시 영국식 옷이 프랑스식보다 간편하긴 했지만, 문제는 프랑스와 영국은 적이었으며 프랑스의 왕비가 적국의 패션을 따라하는것은 불만이 나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변 인물들이 너무 탐욕스러웠던 점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폴리냑 공작부인이죠.
폴리냑 공작부인 욜랑드 드 폴라스트롱
재치있고 매력적이었던 그녀에 대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요제프 2세는 폴리냑 공작부인이 궁정내에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동생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여겼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대중이 나쁘게 기억하게 된 사건이 1785년 일어납니다. 바로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죠. 이 사건은 왕비에게 잘 보이고 싶어했던 로앙 추기경에게 왕비의 친구라는 "잔 드 라 모트"라는 여성이 접근해서 그에게 사기를 친것이었습니다. 이 목걸이는 원래 마담 뒤 바리를 위해 만들어졌던것으로, 이것을 팔기 위해 잔에게 접근한것이었죠. 로앙 추기경은 그녀가 왕비의 중개인이라 철석같이 믿었으며 왕비를 위해 대신 목걸이 대금을 지급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사기라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하지만 왕비의 "사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대중들은 마리가 전혀 관계없었던 이 사건조차도 마리의 잘못이라고 여겼었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이 사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혀 관련이 없었음에도 대중들은 이 사건도 그녀의 잘못이라고 여겼으며 후속 조치들도 모두 잘못된것이라고 인식했다고 합니다.
1786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막내딸인 소피를 낳습니다만, 다음해 소피는 사망합니다. 또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남인 도팽은 어린시절부터 이미 병약했기에 성인이 될때까지 살수 없으리라 여겨졌었죠.
1789년 6월 4일 도팽은 결국 사망합니다. 마리에게는 아마도 큰 충격이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리의 개인적 불행은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시작되죠. 1789년 6월 20일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일어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을 잃은 개인적 불행과 더불어 이제는 군주제마저 위협할지도 모르는 "혁명"에 맞닥들이게 된것이죠.
세 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87년
엘리자베트 비제-르블룅
자료&그림출처
앞쪽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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