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4)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3. 10. 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마리 앙투아네트는 책도 읽었었는데 기억이 안나서 다시 안토니아 프레이저 책을 읽는데 이게 책이 두께가...ㅠ.ㅠ 어흑...완전 장난이 아니네요-0-;;;;

이 책의 최대 단점은 호칭이나 사람 인명을 저보다더 더 맘대로 읽은거라죠. ㅠㅠ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읽다가 짜증냈던 기억이 나는군요....쿨럭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4)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두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여대공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Marie Antoinette

Maria Antonia Josepha (or JosephinaJohanna

(2 November 1755 – 16 October 1793)

1771년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초상화가 딸과 가장 비슷한 초상화라고 흡족해했었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복잡한 절차를 걸쳐서 1770년 4월 마리아 안토니아는 빈에서 프랑스의 도팽과의 대리결혼을 치루게 됩니다. 이제부터 그녀는 프랑스의 도피느 "마리 앙투아네트"가 된것이죠.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고향을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프랑스로 가는 동안 머물게 된 곳에서 그녀를 위한 수많은 파티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770년 5월 7일 프랑스측으로 정식으로 인도됩니다.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도팽 루이 오귀스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이 그날 "완성"된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일년간이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을 괴롭히는데 처음에는 둘사이의 일에 대해서 아직 미숙한 남녀사이의 관계일 뿐이라고 여겼지만, 후에는 가쉽거리로 전락했고 늘 궁정에서는 이 일에 대해서 쑥덕댔었죠.  

 

 

도팽 루이 오귀스트

1769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생활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가의 숙적이었고 프랑스 궁정내에서 여전히 오스트리아를 좋아하지 않는 정치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궁정내의 파벌도 문제였습니다. 궁정에서는 도팽의 고모들이었던 루이 15세의 미혼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정부들을 싫어했는데, 당시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뒤바리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린 소녀로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에게도 정부가 있었음에도 어린 딸들이 그런 사실이나 정부들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교육했고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담 뒤바리가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지 못했었죠. 후에 사실을 알게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경악을 했는데 시고모들은 이런 마리 앙투아네트를 부추겨서 마담 뒤바리를 외면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곧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문제가 되는데 기본적으로 프랑스 궁정에서는 국왕의 관심이 제일 중요했었죠. 하지만 마리가 마담 뒤바리를 외면하므로써 루이 15세 역시 마리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오스트리아측에서는 묵과할수 없는 일이었죠. 결국 마리는 마담 뒤바리에게 말을 걸면서 자신의 의지를 꺽게 됩니다. 그리고 궁정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죠. 

 

 

마담 뒤바리

루이 15세의 정부

1781년

마리 앙투아네트와 남편인 도팽 사이는 미묘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루이 오귀스트가 아내에게 "진정한 남편"이 되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위계승자의 부인으로써 가장 큰 의무인 "후계자를 낳는일"을 하지 못했고 이것은 그녀의 지위를 늘 위협하는 일이었죠. 게다가 루이의 동생들이 결혼했고 특히 둘째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은 결혼해서 곧 아들을 얻었기에 더욱더 마리 앙투아네트의 입지가 좁아지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을 늘 걱정했지만, 이런 걱정은 다정한 표현이 아니라 늘 딸에게 질책의 표현을 쓰게 됩니다. 특히 남편과의 문제에 대해서 늘 딸이 잘못하고 있다고 여겼으며 딸을 다그쳤었습니다. 남편과의 문제와 어머니의 질책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국 도박과 옷등에 빠져들게 합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도박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마리 역시 도박에 쉽게 빠져들게 되죠. 또 마리는 베르사유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으며 이런 그녀는 궁정을 주도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늘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나야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리가 옷에 쉽게 몰두하게 만들었죠.

 


 

마리 앙투아네트

1773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주변에 많은 여성들과 사귀게 됩니다. 특히 나이든 사람들과만 어울리기 보다는 또래의 여성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여러가지를 배우는 편이 괜찮기도 했었죠. 처음으로 사귄 인물은 랑발 공비로 랑발 공비는 공데공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는 똑똑한 편은 아니었지만 매우 상냥하며 다른사람에게 헌신적이었는데 특히 홀아비가 된 시아버지를 돌보는데 무척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에는 좀더 명랑하고 재치있었지만 야심이 컸던 폴리냑 공작부인을 더 가까이 하게 되죠. 또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도 가깝게 지냈고 시누이인 엘리자베트 공주와도 잘 지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승이었던 글룩 역시 프랑스로 와서 왕태자비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랑발 공비 마리 테레즈

사보이의 마리아 테레사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구로 착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776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담 뒤바리와 여전히 불편한 관계였었으며 국왕의 총애를 받는 마담 뒤바리가 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무엇인가를 얻어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바뀌게 되는데, 1774년 4월 루이 15세는 천연두에 걸리게 되죠. 결국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정부인 마담 뒤바리를 궁밖으로 내보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5월 10일 루이 15세는 사망하죠.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오귀스트는 프랑스에 국왕이 될것이며 그의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될 것이었죠.


자료& 그림출처

앞쪽과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