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3)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첫번째)

엘아라 2013. 10. 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많고 많은 내용의 마리 앙투아네트이군요.

어떻게 줄여야할까요..ㅠ.ㅠ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3)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첫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여대공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Marie Antoinette

Maria Antonia Josepha (or JosephinaJohanna

(2 November 1755 – 16 October 1793)

1767년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여대공은 1755년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황제 프란츠 슈테판과 그의 부인인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열다섯번째 자녀이자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밑으로는 남동생인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부모

황제 프란츠 슈테판과 그의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안토니아의 대부모로는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주제1세와 그의 부인인 에스파냐의 마리아나 빅토리아였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대부모들은 미리 선택되었었는데 마리아 안토니아가 태어난 날 리스본 대지진이 발생했고 이때문에 마리아 안토니아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전조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당시 유럽의 통신 상황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린것은 훨씬 뒤였기에 아이가 태어났을때는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듯합니다.마리아 안토니아의 이름중 마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랜 성모 공경의 전통으로 성모 마리아의 이름에서 나온것이며, 안토니아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의 이름에서 딴것입니다. 


가족들은 "안토니아"나 프랑스식으로 "마담 앙투안느"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어린시절은 매우 사적이며 행복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과 아이들과의 생활을 "개인적 영역"으로 두었으며 아이들은 어린시절에는 궁정의 왕족이라기 보다는 좀더 평범하고 즐거운 생활을 보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후에 마리아 안토니아가 프랑스로 시집간뒤 "프티 트리아농"에서 좀더 사적인 삶을 살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죠.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이 그린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와 자녀들

황제와 황후지만 편안한 복장으로 있으며 아이들은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거나 화를 내는 평범한 모습이 그려져있습니다. 뒤에 인형을 들고 있는 어린 소녀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안토니아는 어린시절 늘 가족들에 둘러쌓여있었습니다. 특히 바로 위의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매우 친한 사이였으며 둘은 늘 함께 했었죠. 마리아 안토니아의 교육은 매우 느슨하게 이루어졌는데 마리아 안토니아가 딸이며 늦둥이인점이 한몫했을듯합니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늘 바빴고 이때문에 어린 여대공의 교육을 완벽하게 돌볼수가 없었었죠. 이때문에 마리아 안토니아의 쓰기나 읽기 능력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가의 여대공으로 마리아 안토니아는 여러 언어와 춤과 음악,예법등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모국어인 독일어나 당시 유럽 궁정이나 상류사회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를 그다지 잘 읽거나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이탈리아어를 따로 배웠지만 이탈리아어 역시 잘 하지 못했었습니다. 언어는 잘 하지 못했지만 마리아 안토니아는 글룩의 지도하에 음악을 배웠고 그녀의 음악은 꽤나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었다고 합니다. 글룩에게서 하프를 배웠지만, 독학으로 하프시코드등의 건반악기 다루는 법을 익혔습니다. 또 프랑스 노래나 이탈리아 아리아도 매우 잘 불렀으며 춤도 매우 잘 췄었는데 마리아 안토니아는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춤을 교습을 잘 받았으며 이 덕분에 뛰어난 춤 솜씨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큰오빠 요제프 2세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의 결혼식때 축하공연으로 춤을 추는 동생들

오른쪽의 소녀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안토니아는 막내딸이었으며 여제에게는 딸들이 많았기에 이 막내딸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듯합니다. 하지만 언니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의 죽음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의 결혼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마리아 요제파는 원래 나폴리 국왕과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여제나 프랑스쪽에서는 다음 혼담의 상대로 마리아 안토니아의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여제는 다른 딸을 나폴리 국왕과 결혼시켜야했으며 그 상대가 마리아 카롤리나가 됩니다. 마리아 카롤리나가 나폴리로 시집가게 되자, 결국 프랑스와의 혼담을 추진할만한 딸은 한명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바로 막내인 마리아 안토니아였던것이죠. 여제는 부르봉 가문과의 결혼 동맹을 중요하게 여겼었고 그 최고가 바로 부르봉가문의 수장의 후계자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제 남은 적합한 상대는 막내딸 밖에 없었기에 막내딸과 루이 15세의 손자와의 결혼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힘을 씁니다.



7살 무렵의 마리 앙투아네트


여제는 이제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하게 될 지도 모를 막내딸의 교육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막내딸의 교육이 많이 부족한것을 알고 놀라게 되는데 이것은 마리아 안토니아의 가정교사가 이 어린 여대공의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줬기 때문이라는것을 알게되죠. 결국 교육 담당자가 바뀌게 되고, 또 프랑스어를 제대로 익히기 위해 프랑스 출신의 사제인 베르몽을 초빙하게 되죠. 이 덕분에 마리아 안토니아는 프랑스어를 어느정도 제대로 익히게 됩니다. 하지만 여제가 늘 딸에 대해서 걱정하기 시작한것도 이때부터였을듯합니다.


여러 가지 협상끝에 결국 1769년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도팽이었던 루이 오귀스트와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인 마리아 안토니아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1769년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 마리 앙투아네트 (안토니아 프레이저/정영문,이미애,2006)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