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5)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세번째)

엘아라 2013. 10. 1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55)마리아 안토니아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세번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여대공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Marie Antoinette

Maria Antonia Josepha (or JosephinaJohanna

(2 November 1755 – 16 October 1793)

1778년



1774년 루이 15세가 사망하고 마리의 남편인 루이 오귀스트가 루이 16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남편이 국왕이 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됩니다만, 그녀는 정치적입지가 매우 약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왕비가 권력을 잡을수 있는 것은 오직 "후계자의 어머니"로써만 그랬습니다. 하지만 마리에게는 후계자는 커녕 남편과의 사이에서 여전히 문제가 있었죠. 게다가 이것은 1775년 8월 6일 동서인 아르투아 백작부인이 아들을 낳으면서 더 심해지게 됩니다. 아르투아 백작에게 아들이 태어나면서 이제 왕가의 후계자 문제는 한시름 놓게 됩니다만 왕비로써의 첫번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마리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는것이죠.

또 루이 16세는 어린시절부터 반 오스트리아파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문에 아내가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이었음에도 그녀가 정치적으로 개입하는것을 원치않게 됩니다. 국왕은 왕비가 내각에서 일하길 바란 신하들을 쓰지 않았죠. 




루이 16세 

1775년


이런 좌절감은 마리가 남편이나 정치보다는 도박이나 패션등에 집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는 자신의 주변에 잘생기거나 자신을 찬미하는 젊은이들을 친구로 두게 됩니다. 이들은 당시에 경박하거나 신분이 낮다고 여겨지는 인물들도 많았었는데, 발렌틴 에스테하르지 같은 경우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같은 낮은 신분의 남자를 왜 곁에 두는가에 대해서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마리에게 매우 충성스러웠으며 루이 16세도 그를 신뢰했었다고 합니다. 또 이때 마리는 시동생이자 바람둥이로 이름 높았던 아르투아 백작과도 어울렸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리의 행동은 소문꺼리가 되는 경솔한 행동이기도 했었죠.


또 마리는 1774년 8월 루이 16세로부터 선물 받았던 프티 트리아농을 꾸미는데도 열성을 기울입니다. 이곳은 마리의 사유지로 마리는 이곳을 꾸미는데 열성을 보였으며 특히 이곳에 영국식 정원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이때문에 궁정에서는 이곳이 지나치게 호화로울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마리에게 좋지 않았는데 당시 프랑스 재정상태는 최악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이런 재정상황에도 루이 16세는 영국과의 여러가지 문제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려고 하던 상태였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왕비가 영국식 정원을 꾸민다는것 자체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이었을듯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1775년

이런 화려한 모습의 그녀는 후에 혁명시기에 "사치를 일삼는다"라는 악평을 듣게 합니다.



이런 상황은 국왕과 왕비 사이를 악화시키기도 했는데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77년 4월 마리의 오빠인 황제 요제프2세가 프랑스에 방문합니다. 요제프 2세는 매우 신랄한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막내여동생을 진정으로 아꼈는데 특히 1777년 방문이후 여동생에 완전히 매료당합니다. 그는 이전에 이미 마리에게 편지를 보내서 동생을 꾸짖기도 햇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역시 요제프 2세는 여동생의 철없는 행동을 꾸짖습니다. 하지만 그는 막내 여동생을 매우 아꼈고 이런 애정에서 나온 꾸짖음에 마리는 오빠에게 행동들을 고치겠다고 약속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황제는 또 매제인 루이 16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진지하게 사적으로 단둘이서만 이야기하죠. 이 대화를 통해서 루이 16세는 아내와의 결혼에서 부족했던 문제를 완전히 고치게 됩니다. 요제프 2세가 어떤 충고를 했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의 충고뒤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결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1778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7년만에 아이를 갖게 되죠.



황제 요제프 2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그는 매우 신랄한 말투를 가졌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를 진정으로 아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초상화를 보니 아버지인 프란츠 슈테판이랑 붕어빵이라는 생각이..



1778년 왕비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마리의 상황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의 적들은 그에 대해서 여전히 비아냥거렸지만, 이제 왕비는 후계자를 얻을수 있는 문제였으며, 최소한 왕비가 후계자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죠.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행복한 어머니가 될 준비를 했으며 1778년 12월 결혼한지 8년만에 딸 마리 테레즈를 낳게 됩니다. 오래도록 바라던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은것에 대해서 모두가 실망스러워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가 태어났을때 딸이기에 "넌 나만의 아이가 될거란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기뻐했다고 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아들이 아니라 실망했지만, 루이 16세는 아내 못지 않게 이 딸을 사랑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마리 테레즈

마담 르와얄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째아이


1780년 11월 마리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합니다. 유럽의 궁정 대부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죽음을 애도했죠.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가 벌어질것을 우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제프 2세는 동생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안심시켰었죠. 그리고 얼마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임신한것이 알려집니다. 그리고 1781년 10월 아들을 낳게 되죠. 루이 16세는 아내에게 "마담, 당신은 우리와 프랑스의 바람을 이루셨소, 이제 도팽의 어머니요"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도팽이 태어나기 3일전 요크타운전투(미국 독립전쟁중의 주요 전투중 하나로 프랑스-미국 연합군이 영국에 대승을 거뒀던 전투입니다.)에서 영국군 사령관인 찰스 콘월리스가 항복했기에 도팽의 탄생은 더욱더 좋은 징조로 여겨졌을듯합니다.



프랑스 왕실 가족들

가운데 앉아있는 남녀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이며 둘사이의 아이가 새로 태어난 도팽입니다.

그 앞쪽의 어린 소녀가 마리 테레즈이고 왼쪽의 남녀가 아르투르 백작 부부이고 그 뒤의 아이들이 백작의 세아이들입니다. 오른쪽 남녀는 프로방스 백작 부부입니다.


자료출처

앞쪽과 동일